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부모를 잃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31세 때 만주에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목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 馬勒泰)에게 구호를 받은 후 완쾌되어 신자가 되었다.
몇 달 후에 매킨타이어와 같은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 로스(Ross, J., 羅約翰)를 만나서 세례를 받고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 뒤에 이성하(李成夏)·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과 함께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2년 가을 쪽 복음 형태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간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의 일로, 민족교회 성립의 기초를 이룬 것이었다.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말코복음』을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887년 이른바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중국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으로 성서 번역뿐 아니라 식자와 인쇄도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반포하는 것도 시도하였다.
1883년 성서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의주(義州)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 의주부 집사이며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고향인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솔내(松川) 마을로 이주,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하여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지로 발전시켰다. 1887년 서울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말년에는 솔내 교회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1936년 9월 제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선구자적 선교 사업을 기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