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Moore,S.F.)와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승동(공단골)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다. 무어는 봉건사회의 잔재인 계급제도 타파에 관심을 가지고 전도사업에 노력한 결과 백정들이 많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한때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1905년 8월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으며,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2월 20일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壁)을 중심으로 전문학교 대표들이 모여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가 이 곳에서 열렸으며, 거사 직전에는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 1,500매가 각 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교인들의 민족정신과 함께, 교회의 위치가 탑골공원에 인접해 있어서 거사진행을 돕는 데 쉬웠기 때문이었다.
일제 말엽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1939년 외국인의 주도권에서 벗어나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신학교가 이 교회에서 출발하였다. 이 학교가 오늘날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이다.
1959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나뉘면서 합동측의 총회가 이곳에서 진행되어 합동측 교단의 모체가 되었다. 흔히 합동측을 ‘승동파’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고신(高神)측과의 재분열로 교회건물과 대지를 둘러싼 법정소송이 벌어져 혼란에 직면했으나, 1971년 문제가 일단락되었고 그 뒤 발전을 거듭했다.
1993년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승동교회는 해외 선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고, ‘승동성경대학’을 설치 교인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과 ‘선교위원회’를 통한 아르헨티나 · 중국 · 파키스탄 · 탄자니아 · 필리핀 등에 대한 간접적인 선교지원과 함께 일본 · 필리핀에는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는 선교열의를 보였다.
승동교회는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2009년 116주년을 맞이하였으며, 현재 인도 · 키르키즈스탄 · 아르헨티나 등에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