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말 김원벽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무인 박희도의 주선으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2월 중순에 전문학교 대표들과 회합한 후 2월 20일에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보성법률상업학교생인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생인 한위건과 함께 각 중등학교의 학생 대표자를 뽑아 결속시켰다. 이때 경신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담당하였다. 2월 28일에는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의 대표와 만나서 독립선언서를 나누고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하였다.
3월 1일 정오가 지나자 시내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200여 명의 학생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학생들은 기다리고 있던 민족 대표들이 오지 않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 행진에 나섰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큰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오전 9시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강기덕과 인력거를 타고 시위를 이끌었다. 이날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기를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1922년 1월 잡지 『 신생활』을 발간하는 신생활사의 창립총회에 이사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사회주의 색채가 농후한 『신생활』은 1923년 1월 8일자로 폐간 처분을 받았다. 1922년 3월부터 1923년 4월까지는 연희전문학교의 서기로 일하였다.
최남선이 창간한 『 시대일보』의 창립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3월 『시대일보』가 창간되면서 서무국의 경리부장을 맡았다. 창간 두 달 만에 자본금이 없어 최남선이 보천교에 신문 발행권을 넘기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될 무렵 시대일보사를 떠났다.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면에 정착하여 환사운송점의 전무로 근무하면서 운송점의 연합체인 선운동우회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봉산청년회 혁신과 사리원차지인조합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28년 4월에 발진티푸스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