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보령(保寧). 자는 백진(伯進). 1600년 잡과인 역과(譯科) 왜학(倭學)에 합격하였으며 역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파주에 이르렀으나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때, 왜군이 연안부(延安府)를 공격하여 부사 이정암(李廷馣)의 군사가 거의 궤멸할 단계에 이르자, 적의 세력이 약하여 다음날 아침에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성내에 알렸다.
이로 인해 연안부가 보존될 수 있었고, 그 역시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예빈참봉(禮賓參奉)에 임명되었고, 이후 왕명을 받아 수원의 적 진영에 다녀왔다.
1604년과 1607년 두 번에 걸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남녀 수만 인을 쇄환해왔고, 이로써 당상역관(堂上譯官)에 승진되었다. 한성판윤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