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교장, 장로회신학교 교장, 총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목사이자 보수주의 신학자.
인적 사항
주요 활동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신학적 보혁 논쟁인 1934년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과 여권(女權) 논쟁, 1935년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에서 총회의 연구위원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진보적인 신학의 도전을 막아 내었다. 같은 해 장로회 총회의 표준 성경주석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9권의 성경주석을 편찬, 발간하였다.
1938년 6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일본 동경으로 피신하여 성경주석의 집필에 전념하다가 1942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옮겨가 동북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1947년 7월까지 그 일을 계속하다가 고려신학교 측에서 파견된 목사 송상석(宋相錫)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10월부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학교 설립자 한상동 목사와 학교 운영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며 마찰을 일으키다 6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그의 사임은 고려신학교의 지역적 기반이던 경남노회의 친일전력 목사 대 출옥 성도 간의 갈등이 재점화되는 빌미가 되었으며 1952년 장로교회 분열의 시작인 고려파 분열로 이어졌다.
1948년에는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후 1953년 예장-기장 분열, 1959년 예장 통합-예장 합동 분열 때에 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억누르고 정치적으로 반공주의를 강화하면서 분열에 연루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형룡 자신의 신학도 근본주의적 색채가 강화되었다.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보수신학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처지를 달리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 내부에 많은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1972년 은퇴한 뒤로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저작집 원고 정리 등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학문과 저술
참고문헌
단행본
-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韓國基督敎會史)』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2)
- 박형룡, 『박형룡박사저작전집(朴亨龍博士著作全集)』 (한국기독교 교육연구원, 1983)
- 유동식, 『한국신학(韓國神學)의 광맥(鑛脈)』 (전망사, 1982)
-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논문
- 박용규, 「박형룡 박사의 생애, 저술활동, 신학사상(1928~1960)」 (『신학지남』 340, 신학지남사, 201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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