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교회 ()

개신교
단체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에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서울노회 소속의 교회.
단체
설립 시기
1887년
설립자
호러스 뉴턴 알랜(Allen, H. N., 安連)
설립지
서울 을지로 1가
상위 단체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6
전신
제중원교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남대문교회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에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서울노회 소속의 교회이다. 제중원교회가 전신이다. 1904년 제중원이 남대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이전하였고 이름도 남대문밖 혹은 남문밖교회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민족 운동가를 배출하였고 신사 참배에도 저항하였다. 1987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였고 2015년 6월에는 창립 130주년 기념식을 했다. 교회 건물은 보존 가치가 높은 고딕 양식의 석조 건축으로 2013년에 서울 미래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의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에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서울노회 소속의 교회.
변천 및 현황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에 부설된 제중원교회가 그 전신이다. 제중원교회는 선교사 알렌(Allen, H. N., 주1 및 헤론(Heron, J. W., 惠論) 부부와 메리 스크랜턴(Scranton, M. F. B., 施蘭敦) 등에 의하여 1887년(고종 24) 11월 21일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구리개(銅峴)(현, 을지로1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04년 9월 제중원이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 중구 양동)로 이전되면서 교회도 따라서 옮기게 되었고, 이름도 남대문밖교회 혹은 남문밖교회로 불렸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 H. G., 주2가 관리를 맡았으며, 병원 책임자였던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이 지원하였다. 1907년 병원 안에 별도의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1909년 11월 당회를 조직하여 장로교 주3를 갖춘 조직 교회가 되었다. 1910년 12월에는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기부금으로 새로운 교회당을 세웠고, 1912년에는 초대 담임 목사는 박정찬(朴禎燦)이 맡았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한 집사 이갑성(李甲成), 조사(助師) 함태영(咸台永) 등은 3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갑성은 청년 대표로 민족 대표 33인에 참가하였다. 1924년 12월, 제3대 목사로 취임한 김익두(金益斗)는 유명한 부흥 설교가로서 교회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주4 시비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또한 1934년에 취임한 김영주(金英珠)는 ‘창세기 모세 저작설 부인 사건’을 일으켜 총회에서 이단 여부를 조사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 주5와 조선혁신교단의 설립으로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혁신교단의 의장인 전필순(全弼淳)주6을 요구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다.

1944년에는 김치선(金致善)이 제6대 목사로 부임하여 1953년까지 목회 활동을 하면서 ‘삼백만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고, 현 대한신학교의 전신인 야간신학원도 설립하였다. 6·25 전쟁 때에는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주7 후 다시 지어졌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당시 집사이던 박태선(朴泰善)의 신앙 노선에 문제가 제기되어 이단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1954년 9월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한인교회 활동을 벌이던 김태묵(金泰默)이 부임하여 교회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고, 1957년부터 1979년까지는 배명준(裵明俊)이 제8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박정찬 이후 2013년 현재 손윤탁 목사에 이르기까지 13명의 한국인 목사들이 이끌어 온 남대문교회는 교회의 대형화보다는 새 교회 개척에 정성을 쏟으며 공덕(孔德) · 행화정(杏花亭) · 삼판통 · 청량리중앙교회 · 해방촌교회를 세웠다. 최근에는 맹인교회인 애능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

1979년에는 교회의 역사를 정리한 『남대문교회사』를 편찬하였고, 1987년에는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2008년부터 1885년 6월 21일 알랜의 집에서 드린 외국인 선교사들의 예배를 교회의 기점으로 잡았으며 이에 근거해 2015년 6월에 130주년 기념식을 했다.

의의 및 평가

교회의 주장대로 설립일을 1885년 6월로 할 경우 장로교와 감리교의 첫 교회로 알려진 새문안교회정동제일교회보다도 먼저 설립된 교회로서 한국 최초의 개신 교회가 된다. 교회 건물은 고딕 주8의 석조 주9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높음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 주10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기독교대연감편찬위원회, 『기독교대연감』 (기독교문사, 1993)
『남대문교회사 1885~2008』 (남대문교회, 2008)
『남대문교회사』 (남대문교회, 1979)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새물결플러스, 2016)

인터넷 자료

남대문교회(http://ndmc.or.kr/reMain.do)
주석
주1

호러스 뉴턴 알렌, 미국의 선교사ㆍ의사(1858~1932). 우리나라 이름은 안연(安連).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고종 황제의 시의(侍醫) 및 외교 고문으로 있었으며 광혜원, 관립 의학교를 창립하였다. 우리말샘

주2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미국의 의학자ㆍ선교사(1859~1916). 우리나라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1884년에 초대 주한(駐韓) 선교사로서 경신 학교를 설립하고, 1915년에는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저서에 ≪영한사전≫, ≪한영사전≫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3

직무나 직위에 관한 제도. 우리말샘

주4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道). 우리말샘

주5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신사에 배례하도록 강요하던 일. 우리말샘

주6

구성원 명단에서 이름을 빼어 구성원 자격을 박탈함. 또는 그런 행위. 우리말샘

주7

잃었던 땅이나 권리 따위를 되찾음. 우리말샘

주8

12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생긴 건축 양식. 성당 건축의 전형적인 것으로, 교차 늑골로 받쳐진 아치와 하늘 높이 치솟은 뾰족한 탑 따위의 수직 효과를 강조한 것이 특색이다. 우리말샘

주9

돌을 재료로 하여 건물을 짓는 일. 또는 그 건물. 우리말샘

주10

미래 세대에게 전할 가치가 있는, 서울을 대표하는 근현대 유ㆍ무형 자산.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이와 관련하여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제안을 접수하고 조사 및 심의, 소유자의 동의 등의 과정을 거친다. 주로 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자산을 대상으로 심의하며, 역사적 장소ㆍ건물ㆍ시장ㆍ골목 등의 유형 자산과 기술이나 음악 등 무형 자산도 선정 대상에 해당된다. 우리말샘

집필자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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