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해암(海巖). 함경북도 명천 출신. 보신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누나의 영향에 의해 개종하였다.
그 뒤, 신학에 뜻을 품고 일본의 간사이학원(關西學院) 신학부에 입학하는 한편, 오사카(大阪)에서 교포들이 모이는 북부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1932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할 때까지 계속 시무하였다.
1933년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뒤 강도사(講道師)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934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남대문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후에 장로회 제23회 총회에서는 창세기 저자 문제에 대한 그의 비평학적인 이론이 문제시되어, 결국 그는 총회의 견해에 순응하여 지론을 취소하였다.
1939년 3월 조직된 경성노회(京城老會) 일부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 신학원 설립기성회에 가담하였다. 1943년 3월 일제의 어용기구로 출발한 조선혁신교단을 해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4년 새문안교회에 부임하였다. 8·15광복 후 한국교회를 재건하려는 운동의 하나로, 일본 통치 하에서 강제로 형성된 ‘조선기독교단’을 존치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움직임에 찬동하여 새문안교회를 회의장소로 제공하였고, 9월에는 남부대회를 소집케 하였다. 그러나 감리교·장로교에서 모두 자파 환원을 강력히 주장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8·15광복 후 12월에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환영예배를 주관하였으며, 미군정시대에 서울시 행정의 고문격인 참사(參事)로 있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