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주 출신. 1908년 함흥 영생학교를 졸업, 모교와 영생여학교의 교사로 봉직하였다. 1918년 이후 YMCA운동에 가담하여, 함흥 YMCA의 창설멤버로 얼마 뒤 총무가 되어 1943년 일제에 의하여 폐쇄되기까지 청년운동을 계속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함흥 만세시위를 주동,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1월 1일에는 YMCA회원 1,000명에게 두루마기를 입혀 가두시위를 하였고, 국산품애용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5년 신간회(新幹會) 부회장, 1926년 함흥중앙교회 장로를 지냈다.
1927년 YMCA연합회 관북농촌지도 간사, 1928년 동아일보 함흥지국장을 지내면서 청년운동·농촌운동·언론사업 등 각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43년 함흥헌병대의거의 주동자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년3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공산당에 의하여 3개월간 구금되는 곤욕을 치렀으나, 굴하지 않았다. 1946년 조선민주당 함경 남도당 부위원장·함흥시당 위원장직을 맡아 대공투쟁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