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13일 김관석(NCC 총무), 김수환(추기경), 김홍일(전 신민당 당수), 백낙준(연세대 명예총장),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윤보선(전 대통령), 이병린(전 대한변협 회장), 이인(전 법 무장관),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이희승(전 서울대 문리대 학장), 한경직 (목사), 함석헌(민수협), 김재준(민수협), 천관우(민수협) 등이 모여 시국간담회를 개최하여 “현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아니하고는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각하의 적절한 조처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국민 기본권 보장, 3권분립체제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발송했다.
12월 24일 시국간담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개헌청원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장준하(통일당 최고위원), 함석헌(종교인), 법정(불교인), 김동길(연 세대 교수), 김재준(전 한신대 학장),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낙준, 김관 석, 안병무(한신대 교수), 천관우(전『동아일보』주필), 김지하, 지학순, 박두 진(시인), 문동환(한신대 교수), 김정준(한신대 학장), 김찬국(연세대 신학대 학장), 문상희(연세대 교수), 백기완(백범사상연구소장), 이병린, 계훈제(『씨을의 소리』편집인), 김홍일, 이인, 이상은(고려대 교수), 이호철(소설가), 이정규, 김윤수(이화여대 교수), 김숭경(의사), 홍남순 등이 참여했다.
12월 26일 김종필 총리는 방송연설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어 28일에는 문공부가 유신체제에 대한 부정이나 도전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12월 29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하여,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으로 규정하고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경고했다.
정부의 계속된 경고에도 개헌 요구는 확산되고 야당이 합류하는 가운데 12월 31일 윤보선, 유진오, 김수환 등 15명의 인사들이 대통령에게 민주체제 회복조치를 건의했다. 1974년 1월 4일 개헌청원운동본부는 서명자가 3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1974년 1월 7일 오전 공화당 초대 총재와 4대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이 탈당 성명을 발표하고, 전 사무총장 예춘호도 탈당계를 제출했다. 정구영은 유신체제를 ‘삼권귀일(三權歸一)체제’로 평가하며 재야 인사들과 함께 행동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같은 날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 및 지식인 61명이 서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다수 동포들이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며,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문학인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며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1월 8일 정부는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헌법 개정 폐지 주장·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하고, 1월 13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와 백기완이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함석헌·천관우·안병무·문동환·김동길·법정·김숭경·김윤수·계훈제·이상순·이정규 등이 연행 심문받았다. 이어 2월 25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을병, 장병희 등을 문인 간첩단으로 구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