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교회는 김재준(金在俊) 목사가 설립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로 한국교회의 청년운동과 토착화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해방 직후 남한의 선린형제단(善隣兄弟團) 단원들과 월남한 이북 출신 학생·청년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설립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신학교 교장 김재준이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인수한 일본 천리교(天理敎) 건물(장충동 1가 26-1)에서 선린형제단 단원과 이북 출신 학생·청년 3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경동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강원용(姜元龍)·조향록(趙香祿) 등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김재준 목사가 1946년부터 주일설교를 담당하였으며, 교회명칭은 ‘성(聖)야고보 전도교회’였다.
1947년에는 경리노회의 요청에 따라 ‘경동교회’로 개칭했으며, 교회 신인회(新人會)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독학생연합회(KSCF)가 결성되었다. 경동교회는 당회와 제직회 대신 각종 위원회가 치리권(治理權)을 행사했으나 1948년 당회와 제직회를 조직하고 노회에 가입하였다. 1950년 6·25전쟁 기간에는 피난지인 부산 광복동 신생회(新生會) 사무실에서 예배를 계속했고 청년들은 구호 및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3년 4월 장로회 제38차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가 파면되고 조선신학교 교장에서도 면직되자 동년 6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되었다. 1958년 예배당이 완공되었으며 김재준 목사가 은퇴하고 강원용이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59년 강원용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를 결성했고, 1960년 4·19의거 때는 이 교회의 학생·청년들이 많이 참여했으며, 1995년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남북인간띠잇기대회’에도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였다.
1974년에는 추석에 맞추어 강강수월래 합창과 탈춤이 포함된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고, 1995년 전통식 디자인의 예배복을 입고 첫 예배를 드렸으며, 1996년 기존 찬송가와 전통 찬송가를 묶은 ‘경동찬송가’를 출판하는 등 한국교회의 토착화운동을 선도하였다.
또 1970년대 이후 김재준과 강원용을 비롯한 많은 청년·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1976년 청계천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했으며, 1990년 경동도서실을 개관하고, 1993년 어린이집을 개원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봉사하였다. 강원용에 이어 김호식(19861991), 이동준(19921999), 박종화(1999~) 등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경동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소속으로 1999년부터 박종화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산하에 11개의 신도회와 3개의 교육부, 19개의 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경동어린이집·선한이웃클리닉·도서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경동교회는 한국 개신교 교파 중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로,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한국교회의 청년운동과 토착화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