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출생했다. 경흥의 북일학교를 졸업, 1910년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와 광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동휘의 권유로 1916년 피어선신학교에 입학, 1919년 졸업했다. 이후 3·1운동에 관련되어 함태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남대문교회의 조사가 되었다. 이때 독립운동 관련 창가를 유통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 1922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 1923년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에 편입, 1926년 졸업했다. 같은해 9월 미국에 유학,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프린스턴신학교로 편입, 1928년에는 웨스턴신학교로 편입, 졸업하고, 1930년 같은 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1년 아일리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나, 이듬해인 1932년 귀국해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36년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설립, 운영했다. 1937년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8년 가석방된 후 같은해 11월 사상전향을 했다.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하며, 일본 천황에게 충의를 바치고, 일본 제국의 이상 실현을 위하는 등의 합의서에 날인했다. 1939년 3월 조선신학원설립위원회를 조직하다 김천으로 내려가 황금정교회를 담임했다. 12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지맹의 이사가 되었고, 1941년 말에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이사장이 되었다. 1944년 12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부교구 부교구장이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의 이사가 되었고, 7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총무국장이 되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1951년 7월경 대동군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