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을 지닌 교파형 교회였다. 1905년 장로회 4개 선교부, 감리회 2개 선교부가 협의체를 형성하면서 순수 선교사 중심의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가 결성되었다.이 단체의 목적은 선교 사업을 전개할 때 서로 협력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한국 땅에 유일한 하나의 개신교교회를 조직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6년 이 연합공의회에서 한국인 교회가 참여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와 설립이 준비되었는데, 처음에는 교파를 초월한 ‘하나 된 교회’를 설립하려는 취지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하여 친목과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협의제 성격의 가진 단체를 조직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1918년 2월 26~27일 한국인 교인들이 참여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朝鮮耶蘇敎長監聯合公議會, Korean Church Federal Council)가 창립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적 변혁을 체험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재차 교회 합동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와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를 통합 추진하여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朝鮮예수敎聯合公議會, 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되었다.
초대 회장에는 차재명 목사가 선출되었으며,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규칙의 목적은, ① 협동하야 복음을 선전함, ② 협동하야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③ 협동하야 기독교 문화를 보급케 함 등으로 하였다. 이는 이 단체의 방향이 교회 ‘합동’이 아니라 교회 간의 ‘협동’에 있으며, 권한에 대해서도 ‘이 회는 각 교파 신경, 정치, 의식 등에 간여치 못함’이라고 규정하는 등 한계가 드러나는 형태였다.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이 단체는 처음에 모두 11개의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조선예수교연합장로회(장로교), 조선미감리회·조선남감리회(감리교), 외국선교부에서는 미국북장로회·미국남장로회·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캐나다연합교회(장로교), 미감리회·남감리회(감리교), 기독교기관으로는 대영성서공회·조선기독교청년회 등이 참여하였다.
1931년부터 명칭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바꾸었고, 기독교 기관 중에 회원으로 가입한 수가 늘어나 1937년 단체가 해산될 당시에는 11개 회원단체 이외에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일본캐나다장로선교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8년 해산되었으며 이후 조선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한국인 지도자들이 주도하였고 이로써 각 교파·선교부 간의 선교정책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동안 선교연합공의회에서 관장해 온 재일본 한국인 선교와 한글 정기간행물 발행, 장·감 연합기관의 운영에도 한국인들이 더 많은 권리와 지위를 갖고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내적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선교적 열정으로만 추진되어 ‘하나된 교회’를 향한 구체적인 시도도 못한 채 일제 말기에 유명무실해지고 말았으나, 초교파 선교연합기구에서 한국인의 비중이 높아졌고, 또한 국내외 선교 사업에서 한국인의 능동적 참여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