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조선기독교회 창설자이다. 1913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의 시카고대학에 유학하여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1929년 귀국하여 송도고등보통학교·연희전문학교·협성신학교에 재직하였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감리교회를 창립할 때 총회의 통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에 만주 하얼빈교회의 목사로 파견되어 선교 사업에 힘썼다.
1935년 북만주지방 감리사인 현성원(玄聖元)을 비롯한 한동규(韓東圭)·우인철(禹仁哲)·박세평(朴世平)·김병택(金炳澤) 등의 중견목사들과 함께 감리교회를 탈퇴, 조선기독교회를 창설하였다.
그 이유는 효과적인 만주지방의 선교를 위해서는 교파주의를 극복하여야 하고 외국선교사들의 선교비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행정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선교원칙에 입각하여 길림신학교(吉林神學校)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신학교의 운영은 집단농장 형식을 취하여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인 겨울에 집중적인 교육을 행하였다.
그의 외국선교비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선교정신은 민족독립운동에 연결되어, 만주에 있는 독립 운동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결국 독립운동의 혐의로 길림에서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에는 월남하여 미군정하에서 민선 입법의원에 선출되었고, 1948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총무로 활동하였다. 또한 재건파와 부흥파로 분열되었던 감리교회의 합동운동에 주력, 1949년 4월 기독교대한감리회로 통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