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동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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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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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회.
내용

1910년연동교회(蓮洞敎會)로부터 분리하여 묘동(廟洞)에 설립하였는데, ‘廟(묘)’자를 쓰지 않고, ‘妙(묘)’자를 썼다.

분립된 이유는 담임목사 게일(Gale, J. S., 奇一)이 천민 출신 고찬익(高燦益)·이명혁(李明赫)·임공진(林公鎭) 등을 장로로 삼는 데 불만을 느끼고, 양반 출신의 이원긍(李源兢)·함우택(咸遇澤)·오경선(吳慶善) 등을 중심으로 100여 명이 심한 반발을 한 데 있었다.

교회건축과 운영에 서구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동양적 관점을 강조하였고, 진보적 신앙노선에도 불만을 품어 보수적 신앙을 주장하였다.

1910년 당회가 성립되자 북 장로회 선교사인 밀러(Miller, E. H., 密義斗)가 당회장이 되었고 한석진(韓錫晉)·박용희(朴容羲)·이여한(李如漢) 등이 참여, 그 해 10월 10일 중부 정선 방의동 대묘동(현재 종로구 봉익동)에 대지 201평의 교회당을 신축했다.

그러나 1912년 일본조합교회의 한국기독교 어용화 책동에 말려들게 되어, 이원긍은 선교사배척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에 가담하여 장로교에서 이탈하였다.

제7일 안식교회의 간판을 걸고 안식교회의 목사 김시열(金時烈)이 시무하다가, 1913년 10월 다시 장로교회로 복귀하였으나 1916년 다시 이탈하여 경성일본기독교회와 합병하였다. 1923년 묘동 여자고등학원을 설립하였고 강술임(康述任)이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묘동부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인회에 가입함 으로써 다시 장로교 노선을 지켜나가게 되었다. 1935년 1월 경성노회를 탈퇴하고 새로이 구성된 경중노회에 가담하였다. 광복 후 신사참배 등 친일행위를 한 과오를 뉘우치기 위해 6개월 동안 교회 내의 예배를 일체 중지하기도 하였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로 완전히 복귀하였고, 장로교가 분열되었을 때 통합 측에 가담하였다. 묘동교회는 1967년박한용(朴漢龍) 목사가 부임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묘동교회는 1970년 창립 60주년 기념사업과 1980년 70주년 기념사업 계획을 통해, 묘동장학회 설립, 교회 증축계획 수립, 묘동교회사 편찬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교회증축 계획은 서울시의 증축 불가로 중단되었고, 이를 계기로 종로구 연지동의 조양유치원을 인수 교회를 이전했다. 그 후 1981년 당회에서 결의한 교회발전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인 강남구 대치동에 교회 부지를 마련하여 1982년 건물을 준공했다. 1990년 교회창립 90주년을 기념사업의 하나로 『묘동교회 80년사』를 편찬했다.

참고문헌

『묘동교회 80년사』(묘동교회사 80주년 편찬위원회, 1990)
『한국기독교성장사(韓國基督敎成長史)』(김광수, 기독교문사, 1976)
『연동교회80년사(蓮洞敎會80年史)』(연동교회, 1974)
『묘동교회57년사(妙洞敎會57年史)』(묘동교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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