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 출신. 아버지는 의병대장인 창근(昌根)이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 숭실중학교 학생 30여명과 함께 국민회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1918년에 붙잡혀 복역하고 1919년 출감하였다.
그러나 곧 함경북도 성진군의 3·1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복역하고, 1921년 출옥한 후 1928년 숭실 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3년에 미국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수료하고 귀국, 1934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농촌을 진흥시키는 것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고 절감하고 농촌운동에 투신하였다. 미국의 여류재벌 그린리프로부터 연 4000달러의 지원금을 4년간 기부 받아 장로교 총회본부 안에 농촌부를 신설하고 초대총무가 되었다.
남한일대는 물론 평양·만주에 이르는 지역까지 1주일 단위의 농촌계몽 강연을 3년간 200회 개최하면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알아차린 일본경찰의 체포령에 쫓겨, 1938년 미국으로 피신하였다.
미국에서 4년 동안 1000회에 달하는 한국소개강연을 개최하고, 재미한인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광복 후인 1951년 귀국하여 기독교 연합 봉사대를 창설, 농민운동을 재개하였다.
1964년에는 대전에 기독교여자농민학교, 1968년에는 고양군 일산에 삼애 농업기술학원을 설립하여 농촌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애썼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