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전서≫와 함께 성서를 구성한다. 구(舊)는 그리스도 이전을, 신(新)은 그리스도 이후를 의미하며, 약(約)은 인간에 대한 신적 구원의 계약을 의미한다.
구약이 주로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의 약속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신의 약속이다.
≪신약전서≫는 전체 27권으로 되어 있으며, 복음서(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요한복음), 역사서(사도행전), 서간문(로마서 · 고린도전서 · 고린도후서 · 갈라디아서 · 에베소서 · 빌립보서 · 골로새서 · 데살로니가전서 · 데살로니가후서 · 디모데전서 · 디모데후서 · 디도서 · 빌레몬서 · 히브리서 · 야고보서 · 베드로전서 · 베드로후서 · 요한일서 · 요한이서 · 요한삼서 · 유다서), 묵시문학(요한계시록) 등 4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약전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 그리스어는 1세기경 로마제국의 통속어인 코이네어(Koine語)이다.
예수가 죽은 뒤 20여 년 동안은 기록작업 자체도 별로 일반화되지 않았고, 또 그의 제자들 사이에 팽배했던 종말사상으로 인하여 예수의 인격 및 행적에 관한 문서화작업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말의 지연, 초기 사도들의 사망, 점차적인 교회제도의 확립 및 예배의식에 사용할 문서의 필요성, 이교 · 이단 사상으로부터의 정체성(正體性) 확립에 대한 요청 등으로 인하여 50년경부터는 문서화작업이 진행되어, 여러 신앙공동체에서 수많은 단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단편들 중에서 현재 ≪신약전서≫ 27권이 정경(正經)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신약전서≫의 정경화작업은 몬타니즘과 마르시온에 대한 대응에서 시작되었다.
초대 교회들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많은 단편들 중에서 신앙생활에 가장 표준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교회회의가 이를 정경으로 확정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4세기에 이르러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다른 단편들을 정경으로 인정하였으며, 서방교회에서는 397년 카르타고회의에서 27권을 확정하였다.
정경의 범위가 한정된 것은 이단 및 교리상의 이설(異說)이 교회 내에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정경화과정에서 논쟁이 심했던 책들은 <야고보서> · <유다서> · <요한이서> · <요한삼서> · <베드로후서> 등이었다.
≪신약전서≫ 27권은 책의 형식뿐만 아니라 그 저자 및 기록연대가 다르며, 그 신앙적 · 신학적 내용들도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을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하고, <요한복음>을 제4복음서라 한다.
전자의 세 책은 자료상 공통적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며, 후자인 <요한복음>은 연대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어 위의 세 복음서와 상호보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뒤 수십 년이 지나 기록된 책들인데, 그 형성에 관해서는 대체로 4문서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
즉,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과 예수의 어록인 ‘Q자료’를 기본으로 하여, 마태와 누가 각자의 독립 자료가 서로 혼융되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형성되었다는 학설이다.
제4복음서는 설화라기보다는 교훈적 저작이다. 이 복음서는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이 그의 체류 말년에 구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기원과 초기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복음이 사도 바울의 노고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동료 누가이며, 이 책은 <누가복음>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간문 중에서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의 13책을 바울서신이라 하는데, 오늘날 아무런 이의 없이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로마서> · <고린도전 · 후서> · <데살로니가전서> · <갈라디아서> · <빌립보서> · <빌레몬서>의 7책이다.
<데살로니가후서> · <골로새서> · <에베소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나머지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3책은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그러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책들도 바울의 영향 아래 기록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울서신 13권을 제외한 나머지 7서간문을 공동서신이라 한다.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은 고린도에서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라고 인정된다.
다음으로 <고린도전 · 후서>가 기록되었고, 이어 58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교회에 보내는 <로마서>를 저술하였다. <로마서>는 그의 교리적 서신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모세 및 레위적 제사장직에 대한 예수의 우위와 그의 인격 및 희생을 통하여 ≪구약전서≫의 유형 및 제도들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논증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신약전서≫의 유일한 예언서는 <요한계시록>인데, 이 책은 도미티아누스황제의 박해 기간 동안 기록된 것이며, 그 내용은 밧모(Patmos)섬에서 본 환상에 근거하여 구성되었다.
오늘날 ≪신약전서≫의 원본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그 사본과 번역본이 있을 뿐이다. 사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바티칸 사본과 시나이 사본 ·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을 들 수 있다.
번역본으로는 시리아 역 · 라틴 역 · 곱틱 역 등이 있다. 특히, 라틴 역 중에 405년에 신 · 구약전서 전체를 완역한 벌게이트판(Vulgate版)이 유명하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포교되기 시작하여 상당한 교세를 가지게 될 때까지도 성서에 대한 작업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1795∼1800년 사이에 이가환(李家煥) · 정약종(丁若鍾) 두 사람이 천주교 성서를 번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따름인데, 아마 그것은 4복음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성서가 최초로 전해진 것은, 1816년(순조 16) 알세스트호의 함장 맥스웰이 첨사 조대복에게 건네준 한문 성서가 그 효시이다. 그 뒤 모리슨 · 쿠츨라프 · 토마스 등 선교사에 의해 한문 성서가 전해졌다.
성서의 한국어 번역은 1873년(고종 10)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만주 우장(牛莊)에서 이응찬(李應贊) 등의 도움을 받아 한문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서 시작된다.
1882년에 <누가복음> · <요한복음>을,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번역 · 출간하였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전서≫가 완역되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스 번역이다.
한편, 1884년 일본에서는 관비 유학생인 이수정(李樹廷)이 <사도행전>을 이두(吏讀)로 토를 달아 ≪현토한한신약성서 懸吐漢韓新約聖書≫로 간행하였다.
이어 1885년에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ᄒᆡ≫를 1,000부 간행했는데, 이것이 언더우드(Underwood,H.G.)가 우리 나라에 올 때 가지고 온 우리말 성서이며, 언더우드는 그것을 1894년에 서울에서 수정, 출판한 바 있다.
국내에서의 성서 번역사업은 1893년에 성서공인번역위원회(聖書公認飜譯委員會)가 조직되어 1900년에 ≪신약전서≫를 완역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수정을 가해, 1902년과 1904년의 수정판을 거쳐, 1906년에 최종 수정판이 나왔는데, 이것이 1938년 개역 성서가 출간될 때까지 사용된 성서이다.
1912년에는 공인번역위원회가 해산되고 개역위원회(改譯委員會)가 발족되었다. 개역도 번역만큼 진통을 겪어, 자유 번역이론과 축자적 번역이론이 큰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1937년에 신 · 구약전서 전체의 개역작업이 끝나, 1938년 9월에 ≪셩경개역≫이 나왔다. 개역 성서가 나올 무렵, 일반 출판계는 조선어학회가 내놓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새로운 철자법을 따르고 있었으나, ≪셩경개역≫은 옛 철자법을 그대로 지켰다. 오늘날 널리 읽히고 있는 개역 성서는 1938년 것이 아니라 1956년의 것이다.
1956년 이후에도 새로운 번역이 계속 시도되고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1967년 ≪신약전서 새번역≫이 나왔고, 1977년에는 신 · 구교 합동의 ≪공동번역성서≫가 간행되었다.
특히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가 번역중인 ‘200주년성서’는 그 용도가 학문용으로 규정되어 있는 만큼 전례용(典禮用)의 ‘공동번역’과 더불어 그 공헌이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