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 출신. 어릴 때는 한문공부를 하였으나 1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방랑생활을 하던 중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면서 그 안에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세워 교육에 힘쓰는 한편, 달성 · 경산 · 청도 군 일대의 전도에 힘썼다.
192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3회로 졸업하고 경주 계남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으나 곧 전주 서문밖교회로 옮겼다. 신학교 재학 중이었던 3·1운동 때 학생시위의 경력이 있었던 그는 전주에서 민족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신간회(新幹會) 전주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교회 내에 유치원과 무산아야학(無産兒夜學)을 개설하여 500∼600명의 아동들을 돌보았다. 1929년부터 신현창(申鉉彰) · 유상백(劉尙伯) · 강봉의(姜鳳儀) 등과 함께 독신전도단(후의 복음 전도단)을 조직하여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일대를 중심으로 농촌교회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8년 신사참배반대를 구실로 하여 금지 당하였고, 유치원과 무산아야학운동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계하였다. 1943년에는 가중되는 일제의 탄압과 더불어 병고까지 겹쳐 교회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8·15광복과 함께 전라북도 치안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정치일선에 나섰고, 1946년에는 예수장로교회 남부총회의 제3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탁통치문제가 현안으로 걸려 있던 시기에는 민족자대회(民族者大會)를 조직하여 의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1951년경상북도 달성군의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뒤에 자유당의 국민부장 · 경상남도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자유당정권에 깊이 관여하였으나 곧 탈당하였고, 1954년 민의원선거 때에 대구 갑구 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나는 왜 싸웠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