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기독교인의 만세 시위는 민족대표 33명 중의 1명인 이승훈(李昇薰)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천도교인의 만세 시위는 서울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준비되었다. 당일 장로교회인 장대현교회 앞 숭덕학교 교정에서는 김선두(金善斗) 목사를 비롯한 장로교인들이, 감리교회인 남산현교회 뜰에서는 박석훈(朴錫勳) 목사를 비롯한 감리교인들이, 설암리 옛 대성학교 뒷자리에 자리한 천도교구에서는 천도교인들이 각각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행진하여 합류했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났다. 군중에게는 선언서와 태극기가 공급되었다. 상인들도 철시하고 시위에 가담했으며, 보통학교 학생들도 합류했다. 여기에 학교별로, 동네별로 조직된 시위 군중이 시내로 진출하면서 오후 7시 경에는 낮의 배나 되는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 모여들었다.
시위 군중이 경찰의 발포로 해산한 후에도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다. 다음날부터 경찰은 30여 명의 목사를 체포하는 등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평양 시내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3월 2일부터 9일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매일 벌어졌다. 3일에는 여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일어났다. 4일에는 평양 시내 중등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6일에는 장수원, 태평리, 현교리, 평천리, 오야리 등에서 연인원 1만여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3월 26일과 4월 1일에도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평양의 삼일운동은 서울과 같은 날짜인 3월 1일에 발발하였다. 기독인과 천도교인이 서울에서의 시위 계획에 맞추어 각각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일으킨 연합시위였다. 시위 인원 1만여 명, 목사만 해도 30여 명이 체포될 정도로 대규모였고, 발포는 물론 시내에 무장 군인이 배치될 정도로 격렬했다. 평양의 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4월 1일까지 1달에 걸쳐 일어났으며 평양의 전 지역이 만세 물결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