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생. 1913년 여름 안창호(安昌浩) 등의 후원으로 평양에 청산학교(靑山學校)를 설립하였다.
1914년 평양에서 숭실학교(崇實學校)와 신학교(神學校)의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청년단지(靑年團誌)』를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4년 9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과 항일투쟁의 방안을 협의하였다. 1915년 4월 귀국한 뒤 서광조(徐光朝)·강석봉(姜錫奉)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의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7년 3월 비로소 평양 이보식(李輔植)의 집에서 배민수(裵敏洙)·백세빈(白世彬) 등과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같은 해 6월 조선국민회 회원 배민수·노덕순(盧德淳) 등이 집게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등 결연한 각오로 활동을 벌였고,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간행, 배포하였다.
또한, 중국무관학교(中國武官學校)에 입교할 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하는 등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8년 2월 9일 일본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