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우는 일제강점기 배재학당 학당장, YMCA 총무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이다. 1883년(고종 20) 출생하여 1959년 사망했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하였다. 1903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11년 귀국한 뒤 배재학당의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9월 배재고보에서 물러난 뒤, YMCA 총무로 선출되었다. 1927년 기독교를 통한 농촌개조운동과 민족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의 토착화’, ‘내지 동양화’라는 미명 아래 강연과 좌담 등의 활동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조하였다.
호는 금하(錦霞). 1883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12세 되던 해인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하였다. 배재학당 시절에 접한 기독교와 서구사상은 이후 활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재필 등과 교류하며 민주주의를 배우고 그에게 감화를 받아 협성회와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6세 때 부친과의 약속을 어기고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아 이른 시기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1889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개화와 자강을 위해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 좋다는 아펜젤러의 권유에 따라 1901년 관립 한성덕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학생회 대표로 과격한 정치개혁을 주장하다 투옥되었다. 수감 중 독립협회 주도 인물인 이상재 · 유성준 · 김정식 · 이승만 등과 교류하였고, 벙커 · 게일 등 선교사들이 전달해준 각종 서적을 통해 기독교와 서구 사상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켰다.
1903년 초 출옥한 뒤 선교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남가주대학에 입학하여 서재필 · 윤치호의 뒤를 이어 미국 유학 제2세대가 되었다. 남가주대학 예과 2년을 수료한 후 문리과대학으로 전과해 1910년 학사학위를 받았고, 191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유학하는 동안 1908년 3월 친일 외교관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의 변호사 및 통역을 맡았다.
1911년 5월 귀국한 뒤 모교인 배재학당의 학감이 되었고, 이듬해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10년대 내내 정동교회, 감리교 선교부 교육이사회,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윤치호와 함께 감리교계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하였으며, 감리교와 YMCA를 대표해 각종 기독교 국제대회에 참석하였다. 1919년 3월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미감리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고, 『한국의 재생』이라는 책자를 펴내기도 하였다.
1920년 1월 배재고보 학당직에서 권고사직을 당하였다. 3 · 1운동 당시 평양에 머물면서 만세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배재고보의 교사진과 학생들이 교장 불신임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1920년 9월 배재고보에서 물러나고 그해 9월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인 YMCA 총무로 선출되었다.
당시 기독교가 외국의 신학적 경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조선의 주체적인 신학을 수립해야 한다는 ‘조선적 기독교론’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5년 이상재 등과 비밀결사인 흥업구락부를 결성하였고, 1927년 기독교를 대표하여 신간회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기독교를 통한 농촌개조운동과 민족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농사강습회를 통해 한글과 농사개량법을 교육하고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작농 창정(創定)이나 소작제 모순의 해결을 제기함으로써 농촌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상과 활동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32년 4월 미국 여행 중 『히틀러전』을 읽었고, 그해 10월 「자유와 통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배재학당 시절부터 약 30년간 지탱하였던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파시즘을 제창하였다. 사상전환의 배경에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서구 열강에 대한 회의와 흥업구락부의 침체 등이 있었다.
1932년 6월경 파시즘을 받아들인 적극신앙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주류 기독교계의 강력한 견제로 인해 가시적인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이후 기독교계에서 쌓아올렸던 리더십을 잃고 비주류의 위치로 전락하여 1935년 1월 YMCA 총무직을 사직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의 토착화’, ‘내지 동양화’라는 미명 아래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1937년 8월 조선신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의 거행준비회 발기인,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시국 순회 강연회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말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38년 9월 전향 입장을 밝히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일본정신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1938년 기독교계 연합 친일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친일잡지사인 동양지광사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9년 1월 중국지역 최전방의 일본군 위문행사를 추진하였고,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의 상무이사 겸 총무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42년 2월 동양지광사가 주최한 ‘영미 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발기인과 이사,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침략전쟁에 대한 전폭적인 협력을 선동하였다.
이밖에도 각종 강연과 좌담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였다. 1941년 11월 지원병 보급 설전대로 활동하였고,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감사 축하대회에 참여하였다. 1943년 11월 『매일신보』에 글을 게재하여 지원병 출정을 독려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 공병단의 하청업체인 한국공사를 운영하였다. 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장에 선임되었고, 1950년 주일특명전권대사를 맡았다. 그 뒤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54년 대한YMCA 고문 · 총무를 맡았다. 1957년 민주당 고문으로 추대되어 이승만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1959년 3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