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저격사건은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의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독립의거이다.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는 데 온갖 노력을 경주한 미국 외교관이다.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이 지역 한인들은 스티븐스를 찾아가 발언 정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페리부두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죽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는 데 온갖 노력을 경주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민의 의사와는 달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1908년 3월 21일 니폰마루[日本丸]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자 각 신문기자에 대해 일본의 한국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클로니컬』(San Francisco Chronicle)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한국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한국에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지난 날 정부 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인을 환영한다”고 발언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들은 스티븐스의 발언에 분노하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스티븐스를 찾아가서 신문과의 인터뷰한 내용을 취소하라고 요청하기로 하였다.
3월 22일 오후 8시 공립협회와 각 단체가 회의를 열고, 스티븐스 행동의 대책을 토의한 결과, 최정익(崔正益) · 문양목(文讓穆) · 정재관(鄭在寬) · 이학현(李學鉉) 4명의 대표를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호텔(Fairmont Hotel)에 보냈다. 이들 대표 4명은 스티븐스에게 한국에 관한 신문기사를 정정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한국은 황제가 암매(暗昧)하고, 정부 관리들이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하므로 민원(民怨)이 심하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서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아라사(俄羅斯)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하면서, 기사의 정정을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한인대표들은 스티븐스을 난타(亂打)하였고, 그 날 저녁 한인들은 공동회에서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전명운(田明雲)은 “내가 죽이겠다”고 자원하고 나섰고, 장인환(張仁煥)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어느 분이든지 총 한 자루 사주시오. 내가 내가 그 놈을 죽일 터이니”라고 하였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가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이른 아침부터 페리부두에서 기다렸다. 9시 30분이 되자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부두에 일본영사와 같이 도착하였다. 전명운은 자동차에 내리는 스티븐스를 보고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총이 격발되지 않았다. 이에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달려가 그의 얼굴을 가격하였고, 스티븐스는 전명운을 때리려고 하였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장인환이 총을 쏘아 첫발이 전명운에게 맞고, 연달아 두 발이 스티븐스를 맞추었다.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은 땅에 쓰러졌고,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후인 3월 25일에 사망하였다.
3월 27일 총상을 당해 병상에 있던 전명운은 ‘살인미수’혐의로, 장인환은 계획에 의한 ‘일급모살’혐의로 각기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다.
스티븐스 처단의거를 계기로 재미 한인사회에서 여러 한인단체의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가 탄생하였고, 1910년 2월 국민회는 대동보국회와 결합하여 그 이름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발전됨으로써 미주 한인사회의 최고 지도기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