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파리위원부는 유럽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파리위원부의 황기환(黃玘煥, ?∼1923)이 1921년 7월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유럽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 뒤 유럽의 독립운동은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였던 서영해(徐嶺海, 1902~1949)가 이끌었다.
서희수(徐羲洙)라고도 불리는 부산 출신의 서영해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에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그는 1929년에 유럽 여러 나라에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의 명령에 따라 고려통신사를 설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의 외교활동은 다시 활기를 찾았고, 1934년 4월 2일에 서영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駐佛) 외무행서 외무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서영해는 자신이 묵고 있는 파리 말브랑슈(Malebranche) 7번지의 호텔에 고려통신사를 두었다. 그는 고려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정세와 실상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또한『고려통신』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특히 1940년 7월 20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인 조소앙(趙素昻, 1887∼1958)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조국을 소개하고, 일화(日貨)를 배척하며,일제의 외교와 선전을 방해하는 목적으로 유럽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부터남쪽의 발칸 반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집필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와 민중에 대한 외교와 선전 활동이 중요하고, 소련과의 외교와 선전도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