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양성운동 ()

근대사
개념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미주지역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지역으로 보내고자 한 군사운동. 군사운동.
이칭
이칭
군사운동
정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미주지역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지역으로 보내고자 한 군사운동. 군사운동.
개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미주지역의 한인들과 독립운동 단체들이 군사를 양성하여 원동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군사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용만(朴容萬)은 미국 덴버에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으며, 하와이에서는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멕시코지역에서는 이근영(李根永)이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한 군사운동이다.

내용

하와이와 멕시코지역의 초기 이민자들 가운데는 이른바 광무군인(光武軍人)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와이에 이민을 온 광무군인들은 한인청년들과 함께 각 농장에서 군사훈련을 통해 민족정신과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고, 멕시코로 이민을 간 한인들은 유카탄(Yucatán)에서 군인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려고 하였다.

미주지역에서 박용만은 해외한인 대표들이 참가하는 애국동지대표회를 1908년 7월 11일 덴버(Denver)에서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군사훈련을 시행하기 위한 군사학교 설립안이 통과되었다. 그 후 네브라스카(Nebraska)주립대학(州立大學)에 편입한 박용만은 박처후(朴處候)·정한경(鄭翰京) 등 한인청년들을 규합하여 군사학교를 창설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네브라스카주에 모인 13명의 한인 학생들은 처음에는 기숙하며 농장일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재미한인들은 이때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병학교(兵學校)라고 불렀는데, 일종의 하기군사학교(夏期軍事學校)로 3개월에 이르는 여름방학을 활용하여 군사훈련을 이수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목적은 장기적인 독립투쟁을 대비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여름훈련은 조진찬(曺振瓚)의 농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소문을 듣고 헤이스팅스(Hastins)대학 재무이사 존슨(P. L. Johnson)이 직접 찾아와 대학의 기숙사와 학교시설 일부를 사용하라고 제의하였다. 헤이스팅스대학 건물 한 동과 전장(田莊)을 임대받아 둔전병제(屯田兵制)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고, 1910년 봄 네브라스카주의 한인들은 헤이스팅스대학에서 빌린 농토에 씨를 뿌리며 경작을 시작하였으며, 헤이스팅스대학 교정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되자 미국의 곳곳에 있던 한인청년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으려고 소년병학교로 몰려들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국외에서 설립된 최초의 군사학교로서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소년병학교의 졸업생들은 만주(滿洲)·노령(露領) 등지로 가서 독립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혹은 미군에 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싸웠다.

한편, 멕시코 지역의 한인들 중에는 메리다(Merida)지방회장 이근영(李根永)을 비롯하여, 한성순(韓聖淳)‧양귀선(梁貴善)·조병하(趙秉夏)·서문경(徐文京)·윤은섭(尹殷涉)·강명원(姜明源)·김기홍(金基弘)·차용환(車用煥)·최대현(崔大鉉) 등 전직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광무군인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1909년 4월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조직된 직후부터 유카탄의 띄티, 작골, 쏘실 3곳의 농장에서 여가를 이용하여 매월 한두 시간씩 병법체조를 교련하였다. 그리고 이근영은 각처의 국민회 경찰소(警察所)에 군법체조를 행하게 하였으며, 작둔농장에서는 양귀선을 교감으로 체조연습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같이 멕시코 한인들의 숭무의식(崇武意識)은 메리다지방에서 본격적인 사관양성 기관인 숭무학교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숭무학교는 처음 1909년 10월경 이근영이 한인청년 수십 명을 모아 작둔지방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며, 1910년 3월경에는 메리다 시내에 정식으로 숭무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은 이근영이, 교사는 이종오(李鍾旿)가 맡았고, 멕시코 동포들이 학교를 후원하였다. 이근영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노동 여가에 무예를 연습시켰으며, 군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통학과도 교수하였다. 숭무학교는 설립 초기 약 33명의 생도로 출발하여 1910년 6월에는 70여 명에 달하였으며, 학교가 폐지될 때까지 생도 118명을 배출하였다.

현황

하와이에서 본격적으로 군인양성운동이 시작된 계기는 박용만이 『국민보(國民報)』 주필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박용만은 1913년 7월 2일부터 자신이 네브라스카에서 운영했던 한인소년병학교와 같은 군사훈련 단체를 하와이에서도 설립하려고 하였다. 박용만은 파일애플업(Pineapple業)을 경영하는 박종수(朴鍾秀)에게 말하여 그의 명의로 카할루우(Kahaluu)에 있는 파인애플회사 지배인과 카할루우 지방 975에이커(acre)의 경지를 조차계약(租借契約)하였다. 박용만의 구상은 한인소년병학교와 마찬가지로 둔전병식(屯田兵式)으로 운용되는 군단(軍團)과 사관학교(士官學校)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914년 4월 15일 대조선국민군단 (大朝鮮國民軍團) 사관학교의 창립식은 하와이 국민회의 총회장을 비롯하여, 일반 동포, 각 교회 목사, 중앙학원 교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30일 병학교의 낙성식과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박용만이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건설한 이유는 독립전쟁과 독립 이후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하고 양양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사관학교의 학도 수는 거의 2백여 명에 달하였고 군제는 광무군제로 편성하였고, 군단장은 박용만이 취임하였다. 군영은 호놀룰루시의 동북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Ahuimanu)강을 낀 계곡에 군영이 위치하였음으로 ‘산 넘어 아희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박용만은 사관학교의 생도들을 ‘아이들’이라고 칭하며, 혹은 ‘우리 독립군’이라고 불렀다. 이같이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지만,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에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고,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사실상 폐교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독립군단, 숭무학교 등은 미주지역에서 군인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의 졸업생들은 만주(滿洲)·노령(露領) 등지로 가서 독립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참고문헌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Reedley California, 1959)
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Hawaii 1900-1945(Kingsley K. Lyu, University of Washington, 1947)
집필자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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