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에 미국 국민회(國民會)가 멕시코(墨西哥) 이민 한인을 돕기 위해서 황사용(黃思溶)과 방화중(邦化重)을 멕시코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견묵위원’이라고 일컫는다.
1909년 5월 12일에 멕시코의 유카탄(Yucatán)으로 이민을 온 한인들은 4년 동안의 계약 노동이 끝나자 에네켄(henequén) 농장을 나왔다. 자유의 몸이 된 한인들은 미국의 국민회 본부에 연락하여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요청하였다. 국민회는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멕시코 한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견묵위원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상항(桑港 ; San Francisco) 한인청년회(桑港韓人靑年會)는 견묵위원을 멕시코로 보내는 여비로 6원 50전을 지원하였다.
견묵위원으로 선정된 황사용과 방화중은 멕시코에서 국민회 조직을 결성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들은 1909년 4월 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텍사스주 엘파소(El Paso), 멕시코의 치와와(Chihuahua)를 거쳐 멕시코시티(Mexico City)에 도착하였다. 다시 베라크루스(Veracruz) 항구로 이동하여 한인 동포 8명을 방문한 뒤, 15일에 프로그레소(Progreso) 항구를 통해 유카탄의 메리다(Mérida)에 이르렀다. 메리다에서 멕시코 한인들을 위무하는 한편, 국민회를 소개하며 지방회(地方會)결성에 힘써, 계약 만기를 3일 앞둔 5월 9일에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창립하였다. 창립대회에는 당시 16곳의 농장에서 보낸 한인 노동자 대표들과 회원으로 가입한 314명 등이 참여하였다. 이 때 회장으로는 이근영(李根永)이 선출되었고, 부회장에 방경일, 총무 및 재무에 김윤원, 서기에 신광희, 학무원에 황명수, 법무원에 조병하, 구제원에 김제선, 평의원에 김구현·최정식·이근하·이국빈·유진태·김대선·김성민·김태진·박선일 등이 선임되었다. 메리다지방회는 5월 24일에 국민회의 인준을 거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1909년 6월 16일에 방화중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멕시코를 떠나 1910년 1월 11일에 멕시코를 떠나 27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베라크루스 항구에서 짐을 잃어 버렸는데, 메리다지방회에서 보낸 예납금 1백원도 함께 잃었다. 한편 황사용은 메리다지방회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여러 곳의 농장을 방문하면서 한인들을 위로하고 회원을 모집하였다. 특히 개신교 전도사였으므로, 한인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개신교를 알리기도 하였는데, 캄페체(Campeche) 지역에서는 무릎에 종기가 생겨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10년 1월 11일에 멕시코를 떠나 27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견묵위원은 멕시코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애썼고, 특히 메리다지방회의 결성을 통해서 멕시코 한인 사회가 통합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