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취용리에서 강명화(姜明化)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명화는 평안도지방의 유명한 지식인으로 강영대·강영소·강영문·강영상 등 가족들과 함께 1905년 4월 진남포에서 ‘청룡환(靑龍丸)’이라는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강영각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지내다가, 교육을 받기 위해 미본토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주의 업풀랜드(Upland)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클레어몬트(Clairemont)중학교를 거쳐, 1921년 포모나(Pomona)대학을 졸업하였고,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21년 12월 15일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소년한국(少年韓國)』이라는 학생보(學生報)를 발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하와이 한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임시정부후원회’에서 이사부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하와이 한인사회는 1920~30년대 기성세대의 파벌싸움에 염증을 느낀 청년들과 세력 간의 갈등에 불만을 가진 그룹들에 의해 통일운동이 추진되었는데, 그는 하와이의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그것에 찬동하는 10여 명과 1931년 9월 7일 모임을 가졌고, 그 해 10월 23일에는 청년지도자 40명이 모여 ‘조선소년동맹단’(Federation of Young Korean)이라는 청년운동 조직체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육자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는 한편, 『국민보(國民報)』의 영문주필로 활약하였으며, 안창호가 피체(被逮)되자 흥사단 단원의 자격으로 석방운동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미주지역 한인들이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한인사회의 최고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치하였을 때 하와이에 있는 의사부의 국방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