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학생이 중심이 되어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1895년(고종 32) 12월말, 12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아펜젤러(Appenzeller, G.A.)의 초대로 1896년 5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역사·정치학 등의 특강을 하였다. 이때 강의에 자극을 받은 13명의 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그 뒤 일반인의 입회가 허용되면서 학생단체에서 사회단체로 성격이 변화하였고, 1898년에는 회원수가 3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계몽사상과 입헌군주제의 실천을 구현하기 위한 사회운동단체로 변모하였다. 1898년 2월 임원진은 회장 양홍묵(梁弘默), 부회장 노병선(盧炳善), 서기 이승만(李承晩)이었으며, 그 뒤 이익채·유영석·이승만·한치유(韓致愈) 등이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토론회는 서재필이 강의를 시작한 지 반년 후부터 민주적인 정치역량을 키우기 위해, 학생들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장려한 데에서 자극받아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토론회는 활성화 되었는데, 주제는 크게 자주독립·자유민권·자강개혁(自强改革) 등으로 나눠진다.
자주독립에 대해서는 자주독립론 관계 3회, 자립경제론 관계 2회, 자주외교론 관계 2회 등 7회에 걸쳐 토론되었고, 자유민권에 대해서는 자유평등론 관계 6회, 평등권론 관계 4회, 국민주권론 관계 4회 등 14회에 걸쳐 토론되었으며, 자강개혁에 관해서는 제도개혁론 관계 2회, 국방론 관계 2회, 사회관습개혁론 관계 6회, 신교육론 관계 4회, 산업개발론 관계 8회, 자강개화론 관계 4회, 국학진흥론 관계 3회 등 29회에 걸쳐 토론되었다.
당시 토론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대하여 많은 청중들이 모였으며,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에 협성회는 토론회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토론회는 다른 사회단체와 지방에도 영향을 끼쳐 토론이 대중화·다양화되었다.
그리고 협성회는 토론의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 기관지 『협성회회보』를 1898년 1월 1일부터 발행하였다. 그 뒤 4월 9일부터 일간신문으로 바꾸어 『매일신문』이란 이름으로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일간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약 1년 3개월간 발간된 두 간행물은 민족여론을 창도하고, 민족계몽에 이바지하는 바가 컸다.
이와 같이 협성회는 토론회와 출판사업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민족문제를 제기하여 민족을 각성, 계몽하여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정신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