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독교연합회 ()

근대사
단체
193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친일 종교단체.
정의
193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친일 종교단체.
연원 및 변천

1935년 이후 강제로 시행된 기독교 신사참배는 황민의식을 주입시키는 것 외에 조선의 기독교를 서양의 선교부로부터 이간, 절연시키려는 음모에 의해 진행되었다. 조선교인들의 동요는 선교사들과의 불화와 알력으로 확대되면서 선교부 선교사들이 경영 은퇴하고, 귀국하는 사태로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남아있던 소수의 선교사들은 당국의 강경방침에 굴복하여 어용노선에 투합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기독교는 서양의 선교본부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일제는 1938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기독교를 일본식으로 흡수, 개편시켜 나갔다.

일제는 이해 2월 8일 평양경찰서 주최로 교역자시국간담회를 평양경찰서에서 개최하는가 하면, 4월 25일에는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일본기독교회의 고자카(幸坂義之)와 조선인 14교회 대표를 모아놓고 교역자 간담회를 열어 시국인식·황도선양의 내선일체 완수를 선언하였다.

뒤이어 4월 29일 일왕탄생일에는 조일교역자 신도 1만여 명이 배재중학 교정에 모여 최초의 합동경축식전을 집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8년 5월 8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조일교역자 신도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성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황민적 각성과 전도보국(傳道報國)·신앙보국(信仰報國) 등을 맹세하였다.

그래서 일본계 기독교단과 조선기독교가 통합된 최초의 조직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위원장 니와(丹羽淸次郎), 부위원장 정춘수(鄭春洙)·아키쓰키(秋月致), 서무위원 김우현(金禹鉉)·사메지마(鮫島盛隆), 재무위원 차재명(車載明)·가사야(笠谷保太郎), 위원은 조선인 4명, 일본인 3명, 평의원 조선인 81명, 일본인 2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통합조직은 13도 각처의 대소도시로 확산되어 갔다. 그해 9월 말 현재 52개의 지방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그래서 1938년 7월 7일 서울에서 32개 지방기독교연합회 대표 71명과 경성기독교연합회가 참가한 가운데 이를 통합하기 위한 상위 중앙조직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전선 13도를 30개구(區)로 나누어 30개의 지회(支會)를 두기로 하고, 지방에 2명씩 6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위원장 니와, 부위원장 김종우(金鍾宇)·아키쓰키, 서무 차재명·가사야 등의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연합회 결성은 기독교 황민화체제의 완성으로, 일부 극소수 저항세력을 제외한 조선기독교단의 전면굴복과 종속화를 의미하였다.

참고문헌

『매일신보(每日新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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