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회 ()

근대사
단체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개설

중국 우한(武漢)과 상해(上海) 두 곳에 설립되었다. 그 중 우한계림회는 1941년 4월 30일 한커우(漢口) 조선인회가 일본거류민단에 합류, 해산함에 따라, 그 해 5월 4일 이른바 조선인의 친목과 황민의식 고취, 전쟁 협력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기능과 역할

일제의 영사관·특무 기관·일본인 거류민단·일본상공회 등과 밀착된 친일단체로서, 한커우 특무기관의 나가야마(長山重光 : 조선인, 본명 미상), 한커우 일본상공회의원 백태영(白兌榮), 군부 어용상인인 유진영(柳鎭永)과 조응도(曺應道) 등이 고문으로 있었다.

이사장은 치과의사 고명천(高明天)이며, 기타 김수천(金壽天)·곽덕영(郭德榮)·장찬식(張贊植)·정택근(鄭澤根) 외 수명이 주동급으로 참가하였다.

우한계림회의 활동은, ① 1941년 6월 16일부터 7월 7일에 걸쳐 한커우 일본인거류민단과 협력하여 일본군 위문금품을 모집하고, ② 그 해 10월 31일부터 4일간 장병위문연예대회 개최, ③ 그 해 9월 하순 중일친선을 위한 축구대회 주최, ④ 1942년 4월 19일 중산(中山)공원에서의 조선 징병제 실시 감사축하식을 거행한 것 등이다.

상해계림회는 1942년 9월 회원 174명을 두고 있었다. 우한계림회와 마찬가지로 영사관·특무 기관·일본인 거류민단·일본군 현지부대 등과 밀착해 있던 단체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본거지였던 상해에서 친일행위를 한 반민족 집단이다.

상해계림회는 중국 일원에서도 손꼽는 거물급 친일분자들이 간부급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사장 손창식(孫昌植)은 상해정밀기계공예(上海精密機械工藝) 사장으로, 일본군을 상대해 군수공업을 함으로써 거부가 된 사람이다.

동아신문사 감사역과 덕창연공창(德昌煙工廠) 이사를 겸하였으며, 상해조선인기독교회의 영수로 친일 총력보국회(總力報國會)·충령회(忠靈會) 상해지방위원회 등에도 관계하였다.

상해계림회 수석급(首席級) 이사 이갑녕(李甲寧)은 일본 외무성 촉탁과 상해일본인 거류민단 촉탁, 그리고 상해계림청년단장과 상해극예술연구회장을 겸하였으며, 상해사변 때도 조선인 의용대를 결성해 진지 구축, 군수품 하역작업, 통역·간호·취사 등으로 일본군을 도왔던 사람이다.

이갑녕은 1937년 11월 상해 메두르스트 가로(Medhurst街路)의 한 카페에서 조선인 3명의 저격으로 부상까지 입은 적이 있었다.

상해계림회는 1942년 5월 8일 상해신사(上海神社)에서 일본 공사·영사·군보도부장·거류민단장 이하 군중 2,500명이 모여 ‘징병제실시 봉고제(奉告祭)’ 및 선서식을 가졌다. 그 밖에 일본군 위문, 노역 제공, 국방비·위문금 갹출, 중일친선행사 개최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일제침략(日帝侵略)과 친일파(親日派)」(임종국, 『청사(靑史)』, 1982)
집필자
임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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