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본주의를 표방한 단체로 1920년 1월에 민원식(閔元植)이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지원과 조종으로 자기가 창설한 협성구락부(協成俱樂部)를 개칭, 확대하여 조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의 시점에서 반독립 친일 여론의 조작과 선전 유포를 목적으로 하였다. 국민정신의 발양, 사상 선도, 입헌 사상의 계몽과 민권 신장, 자치 정신 배양 등의 강령을 내세워 신일본주의를 주창하면서 친일 여론의 조작과 반독립 정치 모략의 실천에 광분하였다.
신일본주의란, 한·일 양국의 병립은 과거의 사실이며, 지금은 합체해서 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제 옛날의 일본이 아니요, 조선의 토지와 인민을 포함하는 신일본이다. 즉, 일본 민족만의 일본이 아니라 일본과 조선의 양민족으로 된 신일본이라는 것이다. 즉, 병합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동화를 주장함으로써,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내용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노선에서 참정권 청원의 하청 업체 노릇을 하였다. 일본 「중의원의원선거법」을 조선에 실시해 달라는 것으로, 중의원의원 선출을 미끼로 해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감쇄시키려던 그들의 정치 모략이었다.
초대 회장 민원식은 일본의 각본과 자금 원조로 동경을 드나들면서, 1920년 1월의 제42의회, 1920년 7월의 제43의회, 1921년 2월의 제44의회에 연례 행사처럼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921년 2월 16일, 제3차 참정권 청원서 제출을 위해 도일했던 민원식은 동경에서 애국 청년 양근환(梁槿煥)에게 피살되었다.
그 뒤 김명준(金明濬)·윤갑병(尹甲炳)·신석린(申錫麟) 등이 회장으로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계속하면서, 의회 청원 9회, 일본 정부에 건의서 17회를 제출했다. 그 동안 중의원이 전후 3차의 수리를 의결했을 뿐, 의회에 상정조차 된 적이 없었던 참정권 청원은 일본 정부의 허락할 의사가 없다는 언명으로 1924년 이래 소멸 상태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