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필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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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일제강점기 숭실전문학교 교수, 조선신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편운(片雲), 佐川弼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5년(고종 22) 9월 16일
사망 연도
1973년 3월 16일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숭실전문학교 교수, 조선신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85년 평안남도 중화(中和)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숭실학교를 거쳐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 졸업 후에는 함경북도에서 전도사와 목사로 일하다가 캐나다 선교회의 장학금으로 일본으로 유학했다. 메이지학원 고등부를 거쳐 1925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귀국해 모교인 숭실전문학교와 조선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의 신학은 조선신학교를 함께 설립한 김재준과 가까운 자유주의 신학 계열로 분류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 강요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신사참배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의례라는 태도로 일제에 동조했다. 평양신학교가 강제로 폐교된 뒤, 1940년에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새로 개교한 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학교의 명칭 역시 평양신학교이나 목회자에게 황민화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친일의 정도가 심한 어용 학교였기 때문에 평양신학교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흔히 후평양신학교나 채필근신학교 등으로 지칭된다.

1938년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가담하였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와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도 장로교 대표로 참여했다. 1943년에는 장로교단이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흡수되어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 초대 통리에 올랐다. 반대파는 투옥되는 등 탄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출범한 이 조직은, 찬송가를 편찬할 때 기미가요를 싣고 시국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 예배를 올리는 등 일제에 적극 협조했다. 애국기 헌납 운동라는 이름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후 친일 행위로 투옥되는 등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피난민 위주의 교회인 산돌교회를 세우는 등 목회자로 일하면서 신학교에 출강해 강의를 병행했다. 『비교종교학』, 『신구약주석』 등의 저술을 남겼다. 1973년 3월 16일 사망했다.

채필근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40∼67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장로교회사』(손병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부, 1982)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한국교회사학회, 연세대학교, 1968)
집필자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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