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 예장 호헌측이라고도 한다. 197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총연)가 합동하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호헌측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얻기 이전부터 회원교회의 이합집이 계속 일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극우노선(極右路線)을 표방하여,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와 관련이 깊어 그 지원여부에 따라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호헌측의 기원은 196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기장파의 분열로 장로교회가 어수선할 때 ‘전국 장로교회에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 극우신앙노선의 대변자로 두각을 나타낸 박병훈(朴炳勳)이 1962년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를 결성하였다.
그 당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지지하는 진보파와 복음동지협의회(NAE)를 지지하는 보수파간의 논쟁으로 통합측이 분리되었고, 그 뒤 합동측은 고려파와 합동하여 교단을 형성하고 재출발을 다짐한 시기였다.
그런데 합동측에서는 미국장로교 등 선교부와의 관계단절로 말미암아 미자립교회와 총회·노회에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국제기독교연합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단절 주장을 명분으로 분열된 합동총회는 공식적으로 국제기독연합회와의 무조건 협력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1961년 9월 부산에서 개최된 합동측 제46차 총회에서 국제기독교연합회와의 우호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의한 것이 분열의 직접 계기가 되었다.
그 날로 박병훈을 중심으로 한 국제기독교연합회 지지세력들은 침례교회에서 호헌총회를 조직하고 에큐메니컬운동과의 효과적인 투쟁을 위하여 국제기독교연합회에 가입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 뒤 이 연합회의 재정적 지원 아래 대구신학교를 육성, 호헌총회 신학교로 육성하는 한편 극우운동을 전개하면서 교세확장을 꾀하였다.
그러던 중, 1963년 호헌총회 부회장을 역임하던 최성곤(崔成坤) 등이 1960년 장로교 분열 이후 중립노선을 지키고 있던 교회들을 규합하여 별도로 보수총회를 결성, 분리해나갔다.
그리고 3차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한 박병훈을 교단의 실질적 대표로 남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신임 총회장 송재묵(宋在默)은 1966년 4월 호헌총회를 탈퇴하였다. 이때 국제기독교연합회가 송재묵을 지지하게 되자 호헌총회는 연합회와의 우호를 단절하게 되었다.
이후 외부원조가 없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1977년 1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연)에서 운영해오던 평양신학교와의 합동을 계기로 같은 해 3월 두 교단이 통합,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라고 하였다.
1979년 제63차 총회에서 박병훈이 공로목사로 추대되고 신응균(申應均)이 총회장에 선출되자 지금까지 다른 교단에 대하여 폐쇄적 태도를 시정하려는 소장파 목사들과 교단을 이끌어온 박병훈 등 노장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제64차 총회에서 또 한 차례 분열이 생겼다.
세계선교교회에서 별도로 총회를 소집한 박병훈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라는 옛 명칭으로 다시 환원하였고, 신응균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에 계속 남아서 다른 교단과 활발하게 연합사업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1981년 1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복음측, 대한예수교장로회 서부측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협력기관으로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군복음화후원회·교경중앙협의회·한국보수교단청장년회·평신도협의회·한국교회선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등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대구에 대명고등공민학교 및 애양어린이집(탁아소)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현재 교세는 교회 800개, 목사 650명, 교인 10만여 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