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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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1967년 출범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
이칭
이칭
혁신복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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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독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1967년 출범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
개설

일명 혁신복구파로 알려져 있다. 1948년 5월평양산정현교회에서 조직된 독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1967년 4월 정대신(鄭大信)을 중심으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재조직하여 출범한 교단이다. 칼뱅주의 장로교 헌법의 신조를 신앙고백과 교리선언으로 하고, 1938년 이전의 조선예수교장로회헌법을 사용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일제강점기 말에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이기선(李基宣)은 1945년 11월평안북도 신천에서 개최된 평북노회 퇴수회(退修會)에서 신사참배자들의 권징과 자숙을 내용으로 한 한국교회재건 5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일제강점기에 교회에 남아 활동하던 사람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재건원칙을 받아들인 교회와 노회도 상당수 있었다. 같은 해 12월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조직된 이북5도연합노회 결의문에도 같은 내용들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재건원칙이 전국에 있는 장로교에 똑같이 실시되지 못하고 이행하는 측과 거부하는 측이 나누어져 교회를 갈라놓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1946년 11월 북한의 총선거 이후 공산당의 교회탄압이 더욱 노골화되자 그들의 술책에 따라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는 모순된 현상까지도 빚었다.

이리하여 기성교회 내에서 교회재건운동을 추진하려던 이기선을 중심으로 한 출옥 교인들은 이북5도연합노회 및 기독교도연맹과는 아무 관계 없는 독자노선을 표방하고 독립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의 30여 교회가 이에 가담하였는데 평양 산정현교회가 그 대표적인 교회였다.

이 독노회는 우리 나라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1938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자적으로 교회의 혁신복구안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해 ‘혁신복구파’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이와 같이 1948년 조직된 독노회는 회장 이기선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행정과 신앙을 고수해오다가 공산당의 압박으로 많은 수난을 겪게 되고, 마침내 6·25전쟁으로 이기선이 순교함으로써 독노회의 전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그 뒤 1951년 3월이일화(李日華)·장기려(張起呂) 등이 부산직할시 중구 대청동에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고 혁신복구파의 정신을 이었으며, 다시 1959년 2월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과 중구 회현동에 산정현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독자적인 교단체제를 이루기보다는 고려파·통합파·합동파 등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횡적인 유대관계만 맺고 있었다. 그 후, 1967년 4월 정대신을 중심으로 후암동산정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재조직, 1977년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독노회)로 명칭을 변경·교단을 설립했다.

참고문헌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고려한림원, 1997)
『기독교대연감』(기독교대연감편찬위원회, 기독교문사, 1993)
『한국종교편람』(문화공보부, 1984)
『한국교회박해사』(최훈,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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