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평안북도 주1에서 태어났다. 1904년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5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목사 주2를 받았다.
평안북도 의주군 영산교회, 경상남도 주3 김해읍교회에서 주6, 다시 의주군의 북하동교회 등에서 시무하였다. 김해읍교회 주5 중 주기철, 주남선, 최상림, 방계성, 이약신, 손양원 등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주었다.
일제의 주4 강요가 극심해지자 1938년 교회 시무를 사임한 후 정면으로 맞서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여 채정민 · 주남선 · 한상동 등과 함께 조직적으로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1939년 육군형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평양형무소에서 7년 동안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출옥 후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평양 산정현(山亭峴)교회에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교회정화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한국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원칙을 따르는 교회들은 1949년 5월 독로회(獨老會)를 조직하여 신사참배 교회의 비정통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지역의 30여 개 교회가 가담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혁신복구파(革新復舊派)이다. 이들은 북한5도연합노회(北韓五道聯合老會)와 단절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이기선(李基宣) 목사의 교회재건운동은 남한의 고려파운동과 상응되는 성격을 지닌다. 1950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