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후 북한에서 최초로 설립된 봉수교회의 설립목적에 대해 남한 기독교 연구자들은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첫째, 봉수교회는 1980년대 초반부터 해외교포들이 북한 당국에 교회 설립을 촉구해오고 있던 상황 속에서 1988년 9월 서울올림픽과 1989년 6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가시적 형태의 교회 외형을 갖추고자 설립되었다는 외인론적 입장이다. 둘째, 1950년대 이후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가정교회의 형태로 이어오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하여 북한 당국이 정책적으로 가시화시킨 교회라는 내인론적 입장이다.
1988년 10월 완공되어 11월 6일 첫 예배를 드리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봉수교회는 약 2천여 평의 부지에 450석 예배당과 부속건물이 있다. 부지는 북한당국이 무상으로 제공하였으며, 건축비는 북한 교인들의 헌금과 해외 기독교 단체에서 보낸 지원금으로 충당되었다. 이 교회에서는 매주 북한 목회자들과 해외교포 및 저명한 외국인 전도자들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어서 북한 기독교의 실제적인 선교기관으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남한 및 해외의 도움으로 사회봉사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사회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일환으로 미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봉수국수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공장에서는 약 1만 명 분의 국수를 생산하여 양로원이나 탁아소 등의 주위에 보급하는데 선정 권한은 봉수교회가 가지고 있다. 교회 이름을 공장 이름에 사용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하다.
분단 이전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지역이었다. 남북 분단 이후 공산정권 치하에서 북한의 기독교는 생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런 상황에서 봉수교회의 설립은 북한교회사의 획기적인 사건이자 분단 이후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미약하게나마 신앙을 이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교회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