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태 ()

목차
관련 정보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한 감리교 목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0년(고종 27)
사망 연도
1971년
출생지
경기도 수원
주요 경력
동대문교회 목사, 인천 내리교회 목사,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응태는 일제강점기, 감리교 목사이다. 동대문교회와 인천 내리교회 등에서 목회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기남교구장(1941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전도국장(1943년)에 이어서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로 임명되어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감리교 호헌파 총회 감독을 지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한 감리교 목사.
인적사항

김응태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보흥학교(普興學校) 고등과, 동경 국민중학교 중학과(1916년)에서 공부하였고, 1925년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는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수원 삼일학교(三一學校) 및 충청남도 논산의 진광학교(眞光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계에 봉사하였다.

주요 활동

김응태는 1919년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 입회하여 1921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충청북도 음성교회와 진천교회 등에서 목회하였다. 그 후 만주의 길림교회 · 하얼빈교회 등에서 목회하였고, 다시 귀국한 뒤에는 서울 동대문교회의 담임 주1로 5년 동안 시무하였다.

김응태는 193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재일 교포들의 기독교 신앙운동에 힘쓰다가 귀국하여 공주 지방 주2로 있으면서 대전교회를 발전시켰으며, 인천 내리교회, 창영교회에서 주3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기남교구장(1941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전도국장(1943년),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1945년) 등의 요직을 맡아 일제에 협력하였으며, 총리원 이사, 연합공의회 서기, 교단 총대 등을 역임하였다.

김응태는 1955년 3월 호헌파가 별도로 조직한 총회에서 감독으로 추대되어 4년 동안 호헌파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1959년 은퇴하여 인천에서 여생을 보내며 율목교회를 돕다가 1971년 사망하여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기독교미감리회조선연회록(基督敎美監理會朝鮮年會錄)』 (1919)
『기독교조선감리회제8회중부연회록(基督敎朝鮮監理會第8回中部年會錄)』 (1941)

단행본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주석
주1

교회의 행정과 목회를 전담하며, 신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지도하고 책임지는 임무를 맡은 목사. 해당 교회의 청빙(請聘)을 받아 노회의 승인을 받는 등의 절차를 거쳐 임명된다. 우리말샘

주2

감리교 교직의 하나. 또는 그 직에 있는 사람. 지방 여러 교회를 감독ㆍ관리한다. 임기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말샘

주3

사무를 봄. 우리말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