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구국회 ()

개신교
단체
6·25전쟁 시기 대전에서 결성된 개신교 구국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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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6·25전쟁 시기 대전에서 결성된 개신교 구국 단체.
개설

6·25전쟁 시기 개신교 각 교파의 교역자들이 구국 사업을 위해 조직한 단체로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선무·구호·방송·의용대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50년 7월 3일 개신교 교역자들에 의해 대전 제일장로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대전 선화동 충남도청 청사에 내려와 있었고, 미24보병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대전비행장(현재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대전 사수에 나선 상황이었다.

피난 차 대전에 내려 온 개신교 각 교파의 교역자들은 서울에서 실현하지 못한 구국의 사업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면서 구국 단체를 결성하였다. 회장은 장로교의 한경직(韓景職)이었고, 부회장은 성결교의 김창근(金昌根), 감리교의 황치헌(黃致憲), 구세군의 황종률(黃種律)이었다.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정부가 남하함에 구국회도 전국적으로 지회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7월 17일에는 대구, 9월 이후로는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사업을 계속했고, 이들 지역을 비롯한 13개 도시에 설립된 지회는 국방부 및 사회부와 협력하여 전쟁 중 선무·구호·방송·의용대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3,000여 명의 지원병을 모아 군부대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으로 진격해 올라가자 대한기독교구국회 소속 선무공작대원 약 1,000명은 훈련 후 국군 점령지역에 파송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시기 대한기독교구국회의 조직은 개신교 각 교파 사이의 협력과 연대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반공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 연구』(김흥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한국기독교와 국가 시민사회 1945~1960』(강인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김양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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