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남침 이후 인천지역에 대한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하여 전쟁을 반전시킨 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서울 함락 직후부터 인천상륙작전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9월 15일 2시에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작전은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했고, 이어진 수도 서울 탈환은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년 7월 첫주에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이 계획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JSPOG: Joint Strategic Planning and Operations Group)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츠(Blue Hearts)’라는 작전명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된 나흘 뒤에 이미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으로 7월 하순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할 수 있도록 상륙훈련을 지시하였다.
7월 4일에는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최초의 공식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블루하츠 계획은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시키려 기도하고 작전일자를 7월 22일로 하였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유엔군의 병력 부족으로 7월 10일 경에 무산되었다.
이후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이 마련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 초안이 7월 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상륙작전을 계획하자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100-B, 작전 100-C, 작전 100-D의 세 가지 안을 제출하였다. 작전 100-B는 서해안 중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고, 작전 100-C는 군산에, 그리고 작전 100-D는 동해안 주문진 근처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세 가지 작전에서 최종적으로 작전 100-B가 채택되었고, 잠정적인 D-Day는 9월 15일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다.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요원들을 차출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KATUSA)의 시초였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의 계획은 9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되었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하였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로 하여금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상륙부대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9월 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9월 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9월 12일부터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하기 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02:00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다. 제1단계 작전에서는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가하는 동안 미 해병연대가 상륙하였다. 제2단계에서는 후속하는 부대들이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시가지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9월 16일 미 해병사단이 전진교두보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진격작전의 토대를 마련할 때까지 총 손실은 매우 미미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시키고 북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하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