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하여 2주간에 전개한 철수작전.
내용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정면에 제9병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제9병단은 예하에 제20군단과 제27군단, 제26군단을 두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회의에서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장진호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손실 뿐 아니라 비전투손실도 상당히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하여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반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증원할 수 있는 역량을 소멸시킴으로써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 『6·25전쟁사 7 -중공군참전과 유엔군의 철수』(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0)
- 『한국전쟁』中(국방군사연구소, 1996)
- East of Chosin(Roy Applema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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