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에 경북 영천시 고경면을 소재지로 삼아 창설되었다. 1968년은 북한이 각종 무력도발을 강화한 해였다. 이 해 1월에는 ‘1·21 무장공비 남파사건’을 시작으로 1월 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을 일으켰고, 11월 3일에는 120명의 무장공비를 울진 · 삼척지구에 침투시켰다. 1968년에 계속된 북한에 의한 일련의 무력도발은 대한민국의 군 정예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국방력의 강화와 250만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방위산업공장 설립을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다. 먼저 1968년 4월 1일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총력안보태세 확립과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는 억제력으로서의 사명을 지닌 향토예비군이 대전에서 창설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4월 5일 문교부는 고등학교 이상의 학교에서 군사기본훈련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또한 국군의 전력증강 및 장비현대화도 시급히 요청되었다.
더욱이 국방력 강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국군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의 창설도 절실히 요구되었다. 1968년 8월 16일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12호에 의거 영천사관학교(가칭) 창설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에 따라 1968년 10월 15일에 육군 제2사관학교와 육군 제3사관학교가 각각 창설되었다. 육군 제2사관학교는 전남 광주의 육군보병학교를 감편하여 창설하였고, 육군 제3사관학교는 4개 학교(정보, 헌병, 부관, 경리학교)가 있던 경북 영천에서 전후방으로부터 차출된 새로운 창설요원들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당시 창설학교의 명칭을 육군 제2·3사관학교라 명명한 것은 1968년 9월 20일 육군본부 정책회의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제1사관학교라고 염두에 두고 새로이 창설되는 단기사관학교를 숫자 순에 의하여 명명한 것이었다. 육군 제2·3사관학교는 보병학교에서 분리되기는 하지만, 당시 교육시설과 환경이 열악하고, 월남파병으로 인한 초급장교의 소요가 급증하여 단기과정의 후보생 교육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군 제2사관학교와 육군 제3사관학교는 동시에 창설되었지만 육군 제2사관학교는 교육생 수용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1기생은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만 교육했다. 1969년 3월 18일 육군 제3사관학교의 개교식이 열렸고, 1970년 1월 제1기 사관생도 771명이 임관하였다. 1970년 동일한 두 개의 단기사관학교가 있으면 부정적인 요인이 야기될 수 있으므로 이원화하지 말고 하나로 통합할 것을 대통령이 지시함으로써 1972년 4월 제2사관학교를 제3사관학교에 통합시켰다.
육군 제3사관학교는 1972년부터 교육과정을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하였고, 초급대학과정의 일반학 교육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군사훈련을 포함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육군 제3사관학교는 2004년 12월 「단기사관학교설치법」을 「육군3사관학교 설치법」으로 개정하면서 육군3사관학교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과거에 매년 육군 초임장교의 52% 이상을 배출하였으나 학사사관 · 여군사관 · 간부사관 및 특수사관의 양성기능이 육군 일반명령 제11-133호에 의해 2012년부터 육군학생군사학교로 이전됨으로써 지금은 사관생도만을 양성하고 있다. 사관생도가 수업연한이 2년인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면 군사학 학위와 더불어 일반 대학교(4년제)와 똑 같이 4년제 학사학위를 수여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