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지역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의 9월 공세로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 점령을 기도한 북한군 제15사단을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의 공방전을 통해 격퇴하고 영천을 확보한 전투이다.
북한군은 8월 공세에서 다부동 및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의도였다.
영천에서의 전투는 주로 영천 북쪽과 남쪽에서 이루어졌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적이 영천을 점령하여 대구로 진출할 경우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에는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3개 방면에서 공격을 해왔다. 이에 따라 국군은 방어선이 취약하여 분산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다. 육군본부는 제8사단의 방어선이 돌파됨에 따라 제8사단의 배속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영천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차출해 병력을 운용하였다. 2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국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9월 10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제8사단과 제7사단을 작전계획에 따라 배치하여 남, 서, 북쪽의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으로 국군은 적 제15사단의 전차 및 화포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결국 3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던 적 제2군단에 맞서 국군은 제8사단과 제7사단 및 추가 연대를 투입해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된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의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