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초 신의주에서 장로회 목사 윤하영, 이유필, 한경직 등이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위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윤하영과 한경직 등의 월남과 11월 신의주학생사건의 여파로 당 조직은 와해되었고, 이어 11월 3일에는 조만식을 당수로 하는 조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정당의 연이은 설립이 기독교자유당의 결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45년 11월 초 평양에서 장로회의 김관주와 김화식, 감리회의 송정근과 신석구 등이 기독교자유당을 창립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최초에 이들은 평안북도 정주의 옥호동에서 기독교자유당 조직을 위한 정강 등을 마련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쉽게 정당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47년 9월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논의할 것이 사실화되면서 김화식 목사와 김관주 목사, 황봉찬 목사, 우경천 장로 등이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하여 기독교자유당 결성을 추진하여 11월 19일 결당식을 거행하기로 하였으나 하루 전 북한 당국에 탐지되어 김화식 목사를 포함한 40여 명이 검거됨으로써 기독교자유당의 조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북한 공산주의 치하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수개월 만에 기독교인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북한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정당을 조직했던 사건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