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은재(殷哉). 신재기(申在綺)의 2남이다. 충청북도 청주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