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에는 제2대 전북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노회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함흥에 모인 제13회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 이는 임원을 거치지 않고 선출된 것이었다. 1926년에는 호주 선교부의 초빙으로 경상남도 거창 지역 교회들을 맡아 돌보았으며, 그 결과로 1927년과 1928년 경남 노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일제 말에는 비교적 조용히 목회에만 전념하였으며, 해방 후 1947년과 1948년 연속으로 다시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1947년 남장로교의 대전스테이션(선교기지) 개설을 지원하기 위해 대전으로 이주하여 1950년 삼성동 자택에서 대전고등성학교를 개교하였고, 1954년에는 대전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대전 노회의 별도 설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충남 노회로부터 20여 개 교회를 묶어 분립하는 허락을 총회에서 받아 대전 노회를 설립하고 초대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사이 대전 오정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이자익에 관한 유명한 일화로 김제의 부자 조덕삼이 이자익을 마부로 두게 되었는데 주인과 종이 함께 세례를 받고 심지어 주인보다 먼저 종인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덕삼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이자익의 학비를 대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장로회 헌법에 밝아 세 번이나 총회장을 역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