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경상남도 남해에서 출생하였다. 빈농 출신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17세에 행상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선교사 테이트(L. B. Tate, 최의덕)를 만나 예수를 믿고 조사로 일하게 되었다. 테이트는 그에게 장로 안수를 주고, 임실 지방의 순회조사로 파송하였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6월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때 이자익은 김제군 구봉리교회와 팟정리교회의 전도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이후 목사로서 노회장과 총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교계 활동을 하였다. 전라북도 김제군(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 원평리에서 여생을 보내고 1961년에 별세하였다.
1919년에는 제2대 전북노회장으로 선출되어 노회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함흥에 모인 제13회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 이는 임원을 거치지 않고 선출된 것이었다. 1926년에는 호주 장로회의 초빙으로 경상남도 거창 지역 교회들을 맡아 돌보았으며, 그 결과로 1927년, 1928년 경남노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일제 말에는 비교적 조용히 목회에만 전념하였으며, 해방 후 1947년과 1948년 연속으로 다시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대전에서 신설된 대전성경학교의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대전노회의 별도 설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충남노회로부터 20여 개 교회를 묶어 분립하는 허락을 총회에서 받아 대전노회를 설립하고 초대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자익에 관한 유명한 일화로 김제의 부자 조덕삼이 이자익을 마부로 두게 되었는데 주인과 종이 함께 세례를 받고 심지어 주인보다 먼저 종인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덕삼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이자익의 학비를 대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자익은 장로회 헌법에 밝아 법통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세 번이나 총회장에 역임하는 기록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