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중앙교회는 1900년 강화도에 설립된 감리교회이다. 홍의교회에 다니던 주선일과 그의 인척들이 1900년 9월 1일에 강화읍 신문리 144번지에 6칸 반짜리 초가집을 사 예배처로 사용해 첫 예배를 드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교회 부설 잠두의숙이 신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1908년 정식 학교가 되면서 ‘사립제일합일학교’로 개칭되었다. 1909년에는 부설 여자소학교인 ‘제일합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 명칭은 강화읍잠두교회에서 강화읍교회로 바뀌었으며, 1976년에 현재의 명칭인 강화중앙교회로 개칭되었다.
미국 감리교의 본격적인 인천 선교는 1887년 올링거(F. Ohlinger)를 파송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정동에 거주하며 인천을 왕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올링거를 대신하여 인천에 머무르면서 인천 선교를 개척한 인물은 노병일(盧丙日)과 1892년 서울에서 파견된 전도부인 백헬렌(白Helen)이었다.
1893년에는 존스(G. H. Jones, 한글명 조원시)선교사가 거처를 인천으로 완전히 옮김으로써 인천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인천 선교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존스는 서사면 교항동(현, 양사면 교산리)에 도착해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1893년 가을에 제물포 교인 이명숙(李明淑)을 전도인으로 삼아 강화도 담당자로 파송했다.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자택에서 교인 4~5명을 모아 예배를 시작했다. 이후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존스와 한국인 본처 전도인들의 전도 활동은 강화를 거점으로 하는 섬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오늘의 강화중앙교회는 홍의교회에 다니던 주선일과 그의 인척들이 1900년 9월 1일에 강화읍 신문리 144번지 천교하(川橋下)에 6칸 반짜리 초가집을 사 예배처로 사용해 첫 예배를 드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오늘의 강화중앙교회의 전신이다. 초기 개척 인물로 박능일을 비롯하여 김봉일과 권신일, 윤정일, 정천일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름자의 끝 자를 '일 자(一字)'로 맺고 있다. 이는 ‘주 안에서 한 형제됨’을 다짐하는 뜻으로 본래 이름을 고쳐서 사용한 것인데, 소위 ‘일 자(一字)’ 돌림 신앙의 장본인들이었다.
1901년 초 제물포 지방 장로사인 존스 목사는 강화 선교가 보다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강화 유수가 있는 중심으로 교회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의 위치를 부내면(府內面) 홍문동(弘問洞) 잠두(蠶頭, 누에머리) 부락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기와집 25칸과 초가집 16칸을 206원에 사서 교회당으로 봉헌하고 교회 이름을 ‘강화읍잠두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01년 5월 연회에서 박능일 전도사가 강화읍 구역 담임자로 파송되어 190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시무하며 강화 지역의 선교 거점 교회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부임 후 잠두교회 부설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으로 취임하여 강화에 신교육기관을 탄생시켰다. 후임의 김우제(金宇濟) 전도사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 의식을 조화시키는 목회를 지향하여 민족 계몽과 신앙 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그의 영향으로 이동휘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는 일화가 있다. 강화도 군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이동휘의 기독교 입문은 ‘강화의 바울’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잠두교회는 복음 전도와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에 진력했고, 잠두의숙은 1908년 12월 2일에 정식 학교가 되면서 ‘사립제일합일학교’라 개칭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9년 4월 9일 잠두교회 내 여자소학교인 ‘제일합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신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강화 지역의 열악한 교육 환경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당시 여성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교육적 혜택이었다.
1914년 7월 7대 담임자로 부임한 박봉래 목사는 그해 서양식 벽돌 건물로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교회당을 건축했다. 교회 이름도 지금까지 불러오던 ‘강화읍잠두교회’(또는 ‘신문리교회’)를 ‘강화읍교회’로 개칭했다. 그리고 『강화읍잠두교회역사』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교회의 ‘머릿돌’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강화읍교회는 한국의 근대사적 사건에도 관여했다. 1907년 8월 1일 정미7조약에 의거해 대한제국 군인들이 무장 해제당하자, 하정도 등의 무기고 습격이 기폭제가 되어 진위대 출신 병사들과 주민들이 합세한 무장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강화읍교회의 교인인 김동수 권사 3형제가 순국했다. 또한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해방 이후에도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의 지향성이 이어져 1951년 한국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농촌을 살리기 위해 ‘복민의숙(현,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을 개교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교회 부설 잠두유치원을 개원했다. 1976년에 교회 명칭을 강화중앙교회로 개칭하였다. 2001년 선교100주년기념 대성전이 봉헌되었고, 2002년에는 『강화중앙교회 100년사』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2010년 제29대 담임으로 장영철 목사가 부임하였다.
강화중앙교회는 강화 지역의 선교 거점 교회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는 지향성을 가진 교회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