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주의는 1876년 강화도조약 전후로 일제침략이 시작된 이후, 외교적으로 국권을 상실하게 되는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 전후까지 일제의 단계적 침략에 대한 각종 배일운동과 의병항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1919년 3 · 1운동 사이에 있었던 의병전쟁과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길러 국권을 찾으려는 애국계몽운동 등의 방향과 이념이 정립되면서 성장해 갔다. 그리고 3 · 1운동을 계기로 큰 발전이 이뤄지면서, 1945년 광복 때까지 국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민족주가 형성되는 시기의 항일운동을 유형별로 크게 나누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1876년 개항 전후부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경장까지 전개된 위정척사운동이다. 위정척사운동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적 양반층과 전국 유생들이 주축이 된 운동이었다.
병인양요와 개항을 전후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던 이항로(李恒老)와 문하의 김평묵(金平默) · 유중교(柳重敎) · 최익현(崔益鉉) · 유인석(柳麟錫) · 홍재학(洪在鶴) 등이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양이(洋夷)’와 다를 바 없다는 ‘이적관(夷狄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일본과 강화가 성립되어 문물의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천주교 등이 전파되어 성리학적 전통 질서가 파괴된다는 시대 역행적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같은 반대운동을 외면하고 이전 쇄국정책을 바꾸어 개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개항이 이뤄지면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밀어닥쳐와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이에 위정척사파의 주장은 정계는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공감대가 확산되었고, 비록 정부가 개화시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었지만, 배일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개항 뒤 일본의 침략상을 열거하고 방아(防俄)를 내세우면서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의 외교정책과 기독교 등 서구문물을 논급한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에 대해 낱낱이 비판을 가하며, 정부의 개화시책을 비난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수교통상을 계속하려면 교환되는 사신, 내왕하는 선박의 척수, 통상물품의 종류와 방식에까지 엄격한 제한을 가해야 하며, 특히 수입되는 물품을 조사하여 일본책과 서양책은 모두 색출하여 불태워야 한다는 의론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위정척사파의 주장 속에는 보수적 내용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통찰한 가운데 나온 것이므로, 국가와 민족을 지키려는 애국적 자주의식이 강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일본의 서구화된 문물이 침투하면, 곧 국가의 멸망과 민족의 노예적 속박을 가져올 것이라는 역사적 통찰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 스스로의 의지와 활동으로 이룩한 민족사가 아니면, 민족적 · 국가적 수난이 뒤따를 수 밖에 없으므로, 민족의 의지와 활동만이 민족사의 정통을 이어갈 수 있다라는 자주성의 원칙을 일깨워 민족의식을 고조시키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더욱이, 성급히 개화주의를 신봉하는데서 생겨나는 외세 의존적 정치세력을 견제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원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둘째,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된 농민군의 항일전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세도정치 이후 신분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며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이 내적인 이유라면,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적인 요인보다 외적인 측면이 더욱 농촌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일본 제국주의는 강화도조약 이후 경제적으로 그들의 자본주의 성립을 위해 한국을 침략하여 상품 시장 내지 원료 공급지로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져오는 물품은 주로 자체 생산한 일용품과 중국 상해(上海) 등지에서 구입하여오는 양품(洋品)이었다. 반면에 한국에서 가져가는 것은 미곡과 금 · 은 · 우피 등 귀중한 원료였다.
이와 같이, 일본자본이 침투하면서 농민들은 값비싼 생활 필수품을 사기 위해 미곡 등을 싼 값으로 팔아야만 하였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입도선매(立稻先賣)나 고리대 등을 통해 물품을 구입하게 되면서 농촌 경제는 더욱 피폐해져 갔다.
그러므로 전통사회의 모순에 도전하여 봉기하였던 동학농민군은 청일군이 파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하고 친일정권을 세울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국을 정치적으로 병탄하려는 기세가 보이자 재기하여 구국항일전을 폈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로 근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치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만 치렀고, 전봉준(全琫準) · 손화중(孫化中) · 김개남(金開男) 등 지도급 인물들도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그 뒤 일본군과 관군은 해산, 잠복한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수색, 학살하였다. 그렇지만 농민군의 세력은 삼남일대에서 경기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경도에까지 번져 나아가 전국적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끝내 모두 진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농민군의 항일전은 농민에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깊게 하고, 자아 의식을 고조시켜,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적 항쟁의 터전을 이룩하였다는 데에 적지않은 의의가 있다.
셋째,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초 이래 전개된 의병항쟁이다. 근대에 들어와 최초로 일어난 의병 항쟁은 개항 전후로 위정척사운동을 추진하여 오던 지방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국모 민비(閔妃)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의 세력을 몰아내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의 구국정신은 임란의병(壬亂義兵)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의병 항쟁은 위정척사운동이 적극적으로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강원 · 충청 · 경기도에서 발생한 의병 항쟁이 곧 삼남일대로 번지며, 반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지평의 이춘영(李春永), 제천의 유인석, 이천의 김하락(金河洛), 홍주의 김복한(金福漢), 선산의 허위(許蔿),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장성의 기삼연(奇參衍), 안동의 권세연(權世淵)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유인석의 의병수는 4∼5천명에 달하여 한때 삼남과 경기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충주성(忠州城)을 점거하였고, 노응규는 진주일대에서 커다란 활약을 하였다. 또한, 김하락은 남한산성을 장악하여 서울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의병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일제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정부의 회유 · 진압책으로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의식은 모든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켜, 을사조약 이후 의병항쟁을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한국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자주성을 부각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넷째, 1896년부터 1899년까지 집중적으로 활동한 독립협회 등의 구국계몽활동이다. 독립협회는 민족의 근대적 각성을 촉구하여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부국강병론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의 구국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주독립 · 민권신장 · 개화혁신운동을 통해 근대적이고도 자주적인 국민의식을 형성시켜, 한국민족주의의 핵심을 이루게 하였다.
독립협회의 사상적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서재필(徐載弼) · 윤치호(尹致昊) 등과 같이 서구 시민사상을 도입, 수용한 일파이고, 또 하나는 남궁 억(南宮檍) · 정교(鄭喬) 등과 같이 개신유학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싹튼 개화사상가들이다. 한편, 이상재(李商在) 등은 중도적인 입장에서 독립협회의 현실적 자주자강과 개화혁신을 통해 제국주의 외압을 배제하고 근대국가를 이룩하려고 기도하였다.
정부는 한때 독립협회를 통한 민중의 구국자강책을 받아들여 이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보수적 성격이 강한 집권세력과 일제의 견제에 의해 독립협회는 반정부단체로 규정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전국의 보부상을 동원하여 반동적인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독립협회가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공화제를 만드는 것으로 오인한 정부는 결국 고종으로 하여금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리게 하고, 간부를 투옥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899년을 고비로 독립협회의 표면적인 활동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구국계몽활동을 통해 배양된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은 한국민족주의의 형성에 사상적 핵심이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전후로부터 1919년 3 · 1운동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은 크게 항일의병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계열의 운동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는 방향과 이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
우선, 항일의병은 을사조약 직후, 지방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유생들과 전직 관리, 해산 군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국망을 목전에 두고 최후의 항일구국전을 시도하여, 배일의식을 견지한 농민의 호응을 얻어 일본군과 항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 중 충청남도 홍주성을 점령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민종식(閔宗植), 전라북도 태인(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일어나 순창에서 해산한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 경상북도에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기세를 올린 신돌석(申乭石), 추풍령 일대에서 활동한 노응규 등의 의병부대의 항전이 규모가 컸다. 그 뒤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재기한 의병의 항일전은 1910년 나라가 망한 이후는 물론, 국외에 항일독립군이 터전을 잡는 1914년경까지 전후 10년 동안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것은 을미사변 이후의 의병항쟁의 계승이라 할 수 있으며, 국가존망의 위기에 당면하여 한국민의 주체의식을 표현한 최후의 구국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병구국전은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특히 서울 시위대의 해산 반대 항전을 신호로 원주와 강화도의 진위대 및 전국의 해산 군인이 의병대열에 많이 참가하게 되면서 보다 활발해졌다. 의병부대의 무기가 증강되고, 부대편제가 보다 전투화되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전과를 올리는 일도 많아졌다.
또한, 이와 같이 전력이 강화된 의병부대가 경기 · 충청 · 강원 · 황해도의 중부지방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경상 · 전라, 북쪽으로는 함경 · 평안도에까지 확대되어, 전국 각처 어디에서나 의병활동이 전개된 것이다.
더욱이, 이주 한인이 많은 북간도와 연해주지방 등 국외에까지도 의병의 항일전이 펼쳐져, 그곳에서 두만강을 넘어와 활동하던 의병부대도 있게 되었다. 특히,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는 한때 전국적인 연합전선을 기도하여 유력한 의병부대가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군을 편성하고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전은 시기가 지남에 따라 일본군과의 대규모 작전이 불리해짐에 따라, 산간벽지를 근거로 하는 유격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개되어 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의병의 항일전은 점점 쇠퇴해 갔다.
그 뒤 근거지를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한때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병항전은 국내외에서 1914년경 거의 종식되어 독립군으로 개편되어갔다.
이와 같이 을사조약 내지 군대해산 이후 의병의 항일전은 비록 현실적으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의의는 자못 크다.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민족문화의 수호와 국가의 독립 등은 의병이나 독립군 또는 광복군 등 민족의 군대가 일제와의 항전에서 이길 때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한국 민족주의의 전술이념의 하나인 ‘독립전쟁론’도 의병의 항일전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애국계몽운동은 내용이 다양하여 구국적인 모든 정치활동을 비롯하여,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등의 활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조시키고,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경제를 육성하여 민족역량을 배양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어와 국사연구를 통하여 전통문화의 계승 · 보존을 기하고, 새로운 외래문화의 한국적 수용을 도모하려는 문화적 측면까지 확대시킬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의 중요 근간이 되는 이념은, 첫째는 민족주의 교육에 있었다.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한 민족운동자들은 민족주의 교육이 민족운동의 출발이고 기반이며, 또한 본질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을사조약 전후부터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교육기관을 가능한 한 많이 세우려 하였다. 그래서 서북학회를 비롯한 각종 학회와 그밖에도 결사 · 집회를 통해 구국교육을 외쳤던 것이다.
그 결과, 1910년 경술국치 전후로 국내에 200∼300여 개교, 서간도에 50여 개교, 북간도에 130여 개교 등의 교육기관이 세워졌다. 물론 이 중에는 을사조약 이전에 세워진 신교육기관과 그밖에 민족주의 교육기관이라 볼 수 없는 것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불과 300여 개교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기관에서의 중요한 문제는 교육목표와 이념에 있었다. 당시 한국 민족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인재양성과 민족역량 향상에 가장 역점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교육내용은 종래와 같이 근대의식을 받아들이는 신학문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측면이 커야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문무쌍전교육(文武雙全敎育)을 기도하여 청소년의 군사교육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뒤에 언급할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민족운동의 이념의 하나로 정립하려는 것이었으며,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민족의 군대를 양성하려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민족성을 말살하고 민족문화를 파괴하면서 ‘일본의 광영 있는 황국신민의 명예’를 교육이념으로 하는, 국내의 식민지교육 아래서는 군사교육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변형한 체조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에 국외에서만은 그렇지 않고 군사교육면이 보다 강조된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교육까지를 함께 실시하는 민족주의 교육이 민족주의 이념에서 출발되었다는 사실은, 안창호(安昌浩)의 신민회(新民會)의 교육활동에 대해, “인재는 어떻게 양성하려 하였는고, 뭇 단결한 동지가 국내 각 구역을 분담받아 일반 국민에게 교육의 정신을 고취하여 학교의 설립을 장려하게 하며, 특별히 각 요지에 중학교를 설립하고 보통의 학과를 교수하는 외에 군인의 정신으로 훈련하야 유사시에는 곧 전선에 나아가 민군(民軍)을 지휘할만한 자격자를 양성하려 하였으니, 뭇 중학교로써 정신상 군영을 작(作)하려 하였소”라고 설명한데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교육이념을 좇아 교육을 실시한 국내의 대표적인 학교는, 평북 선천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서울의 청년학원, 안동의 협동학교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국외에서는 북간도에 이상설(李相卨) 등이 세운 서전서숙(瑞甸書塾), 그를 이은 김약연(金躍淵) 등의 명동학교, 서간도의 신흥학교, 북만주의 대전학교(大甸學校), 연해주의 한민학교(韓民學校) 등이 이름있던 학교들이다.
둘째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기도한다는 ‘독립전쟁론’에 있었다. 독립전쟁론이란,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바른 길은 한민족이 적절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어야만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이를 위해 온 국민은 무엇보다 독립군(또는 광복군)을 양성하고 군자금을 내어 군비를 갖추어 일제와의 혈전을 최대의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란, 민족의 근대적 정치 · 경제 · 문화의 역량을 향상시켜 시기를 기다리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하여 중일전쟁 내지 러일전쟁 또는 미일전쟁을 감행할 그때를 말한다.
이와 같은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이 시기의 거의 모든 민족운동자들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한 독립운동기지란 이주 한인이 많이 살고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국내진입이 가능한 서북간도와 연해주에 민족정신이 투철한 한인의 집단적 거주지역을 만들어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아, 독립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을 모아 근대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며,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과 민족운동의 역군을 양성하려고 하였다. 한편, 기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동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면서, 해외에 있는 한민족을 조직, 무장화시켜 독립전쟁을 준비해 갔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기지로 유명한 곳이 이회영(李會榮) · 이시영(李始榮) · 이동녕(李東寧) · 이상룡(李相龍) 등이 앞장서서 설치한 서간도 삼원포(三源浦)의 한인거주지역이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경영된 곳이 북간도의 용정촌(龍井村)과 중러국경지대에 자리잡은 밀산부(密山府) 봉밀산(蜂蜜山)의 한흥동(韓興洞)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곳들을 중심으로 서간도 합니하(哈泥河)의 신흥학교, 북간도 나자구(羅子溝)의 대전학교 등이 설립되어 문무교육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14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상설 · 이동휘(李東輝) · 이동녕 · 정재관(鄭在寬) 등이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고, 의병 항일전의 노선을 포용하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의 터전이 구축될 수 있었다.
1912년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던 신민회에 대한 일제의 다음과 같은 재판 판결문은 독립운동기지 설정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이다.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도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재력 있는 다수인민을 동지(同地)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신영토를 삼고, 새로이 다수의 교육받은 청년을 모집하여 동지에 보내어 민단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개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베풀어,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전쟁론 구현을 위한 무대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주로 국외지역이었으나, 기반은 어디까지나 국내에 있었던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서는 일제식민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제약과 탄압이 컸지만, 가능한 한 교육과 경제의 향상을 통한, 그리고 민족문화의 보존 · 연구 등을 통한 한국민족주의 이념을 확대, 심화시켜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3 · 1운동은 “그 이전의 민족운동이 이곳으로 합류되고 이후의 민족운동이 여기서 선도되는 일대사조”라고 비유되기도 한다. 3 · 1운동은 신분 · 직업 · 지역 · 신앙 · 성별 · 빈부 등을 초월한 전민족의 일치된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3 · 1운동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조화되면서 한국민족주의의 내용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3 · 1운동이 일어난 이후의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주류는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족주의의 주된 사조로 이념이 정립된 ‘독립전쟁론’이다. 모든 독립운동의 자금을 독립운동자금이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군자금’이라 부르며, 국민 각층에서 끊임없이 연출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둘째는 3 · 1운동 이후 국내에서 주로 추진된 ‘문화주의론’이다. 이것도 독립전쟁론과 같이 민족의 광복과 독립은 일제의 자의적인 허용 따위의 타율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한민족의 실력이 일본과 대등할 때, 비로소 민족의 광복과 독립이 확실하다는 근거에서 나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제식민지배 아래에서 독립군을 훈련하고 그들과 작전을 감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먼저 문화적인 의미에서 정치 · 경제 · 교육 · 언론 · 사회 등 모든 면의 향상을 당면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셋째는 ‘외교주의론’이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 수립은 국제평화와 인류공영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민족독립의 실현은 먼저 국제적 후원 · 지지하에서만 비로소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자립의 당연성을 열강에 널리 선전하는 한편, 일제의 불합리한 강제지배가 한민족의 탄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것임을 인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동의와 후원으로 일제를 견제하고 아울러 민족전진의 목표를 정립하려는 것이다.
넷째는 ‘민중투쟁론’이다. 한민족의 현실적 여건이 일제의 군사적 강제지배하에서 가능한 독립론이란, 오직 민족의 구성원이 다함께 직접 항일투쟁에 가담함으로써, 일제로 하여금 한민족의 식민지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몇 가지는 이미 을사조약 이래의 민족운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독립전쟁론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3 · 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는 아직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서로 효과적인 연관관계가 성립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족적인 3 · 1운동이 일어난 뒤로는 이들 전부가 부각되었고 또한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며 민족사회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나아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한국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3 · 1운동이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라는 형태로 민족의 굳은 독립의지를 내외에 밝혔지만, 직접적으로 돌아온 것은 일제 군경에 의한 학살뿐이었다. 이에 보다 더 근원적인 민족독립운동을 모색하여 나온 것이, 바로 근대적 자각에 입각한 민족역량 향상운동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신교육열이 팽배해지면서, 비록 일제 교육기관이라 할지라도 민족의식만 버리지 않으며 근대의식과 문명기술을 익히겠다는 결의로 입학을 지원자가 급증하였다. 또한 사립학교 · 강습소 · 야학 등의 설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러한 경향은 민족교육의 큰 전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조선교육회의 설립으로 이어져 갔다.
언론에 있어서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그 전후에 창간된 여러 잡지를 중심으로 근대적 저널리즘이 형성되어갔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족의 근대의식이 전국민에게 깊숙이 심어졌다. 또한, 이와 같은 추세는 문화예술면까지 자극하여 서구 것의 도입과 한국적 사색의 터전이 되었다.
한편, 민족역량 향상의 기조는 경제력에 있으며, 그것은 바로 민족산업의 육성과 진흥에서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리하여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어 조선물산장려회를 중심으로 자작자급 · 국산장려 · 소비절약 · 금주단연 등의 실천강령까지 마련되었다.
즉, 의식주를 조선인이 만든 것으로 하자는 자립적 풍조가 형성되고, 아울러 민족자본의 형성이 강조되었다. 어떤 민족운동가는 한민족의 진로는 바로 경제적 민족주의에 있다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전후로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일대와 연해주지방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그 결과 3 · 1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일제와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을 편성하고 무기를 갖추어,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일대에서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서북간도에 군정부가 건립되고, 대한국민회군 · 북로군정서 · 대한독립군 · 서로군정서 · 대한독립단 · 광복군총영 등의 무장독립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1920년 봉오동전투 · 청산리대첩 등에서와 같이 커다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항일전은 우선 승패를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1930년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며 한민족의 강인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하에 광복군을 편성하여 연합군과 공동으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이러한 독립군의 항일전의 계승이었다 하겠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지원청원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 외교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점으로 구미위원부와 파리대표부, 그밖에 구미 등 각종 한인결사를 통하여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 뒤 국제연맹 · 태평양회의 등의 국제회의에서 한민족의 광복뿐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신문 · 잡지 · 강연회 등을 통하여 한민족의 자주성과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인식시켜 주었다.
이밖에도 3 · 1운동 이후 의열단과 애국단 등이 조직되어, 일제침략자들과 통치기관에 끊임없이 폭탄을 던져 그들을 전율케 하였다. 한편, 독립운동의 민중화를 위한 농민운동 · 노동운동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3 · 1운동의 형태를 잇는 6 · 10만세운동 · 광주학생운동, 그밖의 각종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운동의 성격을 띤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국내외 독립운동은 얼핏 보아 서로 유리된 듯이 보이지만, 임시정부와 국내외의 각종 항일결사, 기타 민족운동자를 통해 서로 긴밀히 연락이 추진되었다. 또한 지상목표가 민족의 광복과 독립의 달성이라는 명제에 귀결되고 있었다.
민족운동자 각자의 사회적 · 경제적 처지와 국내 · 국외라는 지역적인 조건에 따라 각기 자기에 알맞은 일을 추진하는 것이 그대로 민족운동 · 독립운동이었고, 나아가 한국민족주의의 발전과정이 되었던 것이다.
개항 전후부터 시작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배일운동은 시기와 역사적 조건에 따라 각종 형태로 달리하며 계속 전개되었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전에는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각기 달라, 투쟁이념 또한 일치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성리학적 전통질서의 재확립을 이념으로 한 위정척사운동과 그에 연원을 둔 의병항쟁은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시대 역행적인 보수반동사상이라 할 위정척사론에 기조를 두고 있었다.
또한 전통양반사회에 도전한 농민군의 항일전은 근대사상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전통이념과 양반사회를 부정하는 농민과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및 외세를 배척하려는 ‘척왜양사상(斥倭洋思想)’의 바탕위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주자강과 개화혁신을 통하여 개화와 외압의 배제를 목적으로 활동한 독립협회 등의 구국계몽활동은 개화사상이 주류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각 항일운동은 이념과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표현에 있어서는 다같이 제국주의 외압을 배격하여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자주성을 이어가려는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위한 민족운동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족운동을 통해 형성된 민족의식과 근대의식은 한국 민족주의 성립에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하였고, 개화와 외압에서 시작된 한국근대사로 하여금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며,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큰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형성된 한국 민족주의는 을사조약을 전후로 전개된 의병의 항일전과 애국계몽운동이라 부르는 민족운동을 통해 방향과 이념이 정립되면서, 일제와의 투쟁전술론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은 민족의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 문화적 각 방면의 역량을 향상시키는데 주도적이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세가지 면에 특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대항하면서 민족의 근대적 교육을 발흥시켜 민족의식과 근대의식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민족주의 교육이념은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며,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두었다.
둘째는 해외에 한국부흥의 터전이 될 독립운동기지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며, 무관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에 있어서 자주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3 · 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주된 사조가 된 독립전쟁론으로 정립되었으며, 당시 한국민족주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을사조약 전후의 보안회(輔安會)에서 시작하여 대한자강회 · 대한협회 등을 거쳐 신민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구국결사를 통하여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한국민족주의를 민중 속에 성장시켜 나갔다. 그 뒤 민족독립운동의 방향을 국내외를 통한 거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한국 민족주의의 이념은 을사조약 이전의 항일운동의 여러 사조인 위정척사론과 동학 및 개화자강사상을 조정, 융화시켜 일제에 대항하면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방향으로 정립되어 갔다. 특히, 의병 항일전의 무력항쟁 노선을 독립전쟁론으로 포용, 승화시켜 자주성이 뚜렷한 한국민족주의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한국민족주의는 3 · 1운동을 계기로 큰 발전을 보았다. 3 · 1운동 이후 민족구성원은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군자금을 제공하고, 독립군이 되어 항일전에 참여하고, 폭탄을 일제에게 던지고, 임시정부나 그밖의 항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교육을 비롯하여 산업 · 문화 · 언론 · 사회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민족독립운동에 이바지한 동시에 근대민족의식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한편, 3 · 1운동 이후의 이와 같은 독립운동의 추진력이 된 한국 민족주의가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면의 도전과 그에 대한 항쟁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일제의 식민지배 형태가 무단통치에서 민족운동을 보다 근원적으로 탄압하는 내용을 가진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형태로 변모된 일이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워 ‘문화주의론’에 기여하는 듯이 가장하며, 민족문화를 파괴하고 나아가 민족의 일인화(日人化)를 통한 민족성 말살에 목적을 두고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을 왜곡하려 하였다. 또한 ‘외교주의론’이나 ‘독립전쟁론’을 불식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둘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질서가 제국주의 열강의 권익을 옹호하는 베르사이유강화체제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한국 민족주의는 그와 상치되는 주장과 활동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도의적 측면에서는 국제열강의 동정과 지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적 측면에서는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제약하였다.
이러한 면은 독립운동과정에서 외교활동이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손문(孫文)이 이끌던 호법정부(護法政府) 이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열강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을 이룩한 공산주의가 약소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지원한다는 테제를 내걸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