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미추홀현(彌趨忽縣, 또는 彌鄒忽縣)이었는데, 백제가 점령한 뒤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다.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까지 100여 년간 중국의 동진 · 송 · 북위와 내왕하는 근거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서 · 남해안 지역과 개성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문학산성(文鶴山城)과 계양산성(桂陽山城) 등을 수축하였다.
조선시대에 제물진(濟物鎭)이 설치되어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으나 효종 때 강화도로 옮겼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수립할 때 제물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수로를 개척하여 유사시 왕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行宮)을 월미도에 지었으며, 제물량(濟物梁)에는 수륙(水陸) 양군을 배치하고 2척의 배를 대기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연결되는 중림도(重林道)의 종착역이었으며, 영종도(永宗島)를 연결하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 이곳은 특히, 삼남(三南)의 조선(漕船)이 한강에 진입하기 전의 정박지였으므로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
제물포의 지명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는 ‘거친 들판(맷골)’, ‘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다.
제물포는 1876년(고종 13)의 강화도조약과 1882년의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뒤 개항장으로서 급속히 변모해 나갔다. 1883년에 일본조계(日本租界)가 설치된 뒤 이듬해 청국조계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자유공원(自由公園)을 중심으로 15만여 평 지역에 설치되었다. 이로 인하여 북성포(北城浦) 일대의 포대(砲臺)와 토둔(土屯), 응봉산(應峰山)의 토둔과 망루(望樓) 및 민가(民家) 40여 채가 철거되었다.
1913년 조계제도가 완전히 철폐된 뒤 1914년 인천부로 승격하였다. 이로써 행정구역상 조선 말기의 인천도호부가 인천과 부천군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1968년 제물포 지역이 중구로 변경되고,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에는 광역시로 변경되어 그 관할하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