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만조 때 바다로 둘러싸인 공간을 섬이라고 하지만, 월미도는 1920년대 돌축대를 통해 연육이 되었다. 그러나 월미도의 역사·지명이 인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월미도는 월미도(月尾島), 어을미도(漁乙未島·於乙味島), 어미도(於味島), 얼미도(突尾島)·얼도(突島)·월성(月星) 등이 있다. 한때 제물도(濟物島)라 부른 적도 있다. ‘얼’이라는 글자는 ‘얼다’ 곧 ‘사랑하다’, ‘어르다’의 의미이고, ‘미’는 ‘물[水]’를 의미하기에 결국 ‘물이 섞이는[어르는·휘감아 도는] 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한말에는 ‘Rose Island’로 외국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육속화하기 전의 이 섬의 둘레는 1㎞, 육지와의 거리 1㎞의 아담한 섬이었으며, 남쪽에는 소월미도가 있었다.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의 북서쪽 방파제 역할을 한다.
본래 인천도호부 관할이었으나 1653년(효종 4) 용종진이 설치된 후 그에 편입되었다. 월미도에는 조선 후기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이 설치되었고, 행궁은 존속기간 내내 영종진 관할이었다. 월미도 행궁은 대체로 18세기 전반까지는 유지된 듯하다.
총독정치가 시작되면서 월미도를 풍치지구(風致地區)로 지정하고 월미도 중턱에 순환도로를 축조하였다. 철도국은 목욕탕을 개설하고 일본 요정인 용궁각(龍宮閣), 호텔, 동물원, 하계야영 캠프촌 등을 만들어 임해유원지로서 명소가 되었다.
1922년 석축제도를 축조하여 월미도는 육속화되어 섬으로서의 역할이 끝났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5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월미도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월미도는 인천개항을 전후하여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기지로, 6·25사변 때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그 뒤 미군용지로 이용된 일도 있었다.
2001년 6월 26일 문화관광부가 월미관광특구 지정의 일환으로 월미도 문화의 거리내 친수공간 확장과 월미산을 개방하기로 하였다.
1980년 이후 관광지가 조성되어 각종 위락시설과 해수욕장·호텔이 갖추어져 있다. 1989년부터 꾸며진 문화의 거리에는 문화행사인 월미축제로 시민의 문화의식 고취와 지방예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근의 놀이공원과 함께 각광을 받는 곳이다.
2001년 6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었고, 거리의 길이는 770m, 폭은 20m이다. 이 거리의 끝지점에 바다로 난 길이 있다. 문화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바닷가, 왼쪽으로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다. 이 곳에서 매년 ‘월미관광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월미관광문화축제 중에 풍어제, 인천근해 갯가 노래, 뱃노래, 은율탈춤, 국악제 등 전통적인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