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상은 고정된 점포가 아닌, 각지를 돌아다니며 상거래를 하는 상인이다. 도붓장수·장꾼·보부상이라고도 한다. 전업 상인 외에도 농사를 짓거나 수공업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행상의 밑천은 팔 물건을 사고, 그것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근력, 혹은 말·소·노새 등을 장만할 정도면 족하였다. 이들은 물품 매매와 더불어 다른 지방의 소식을 전달하거나 혼인을 중매하기도 했다. 상설시장과 점포가 늘어나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는 등 자본주의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 20세기에 점차 사라졌다.
도붓장수 · 행고(行賈) · 여상(旅商) · 장꾼 · 보부상이라고도 한다. 행상은 가장 원초적인 상인 형태로, 좌상(坐商)도 행상에서 파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기록상 상업활동이 최초로 보이는 때는 삼한시대이며, 삼국에도 시사(市肆:시장거리의 가게)나 경시서(京市署)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시장과 상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는 상업을 억제하지 않았고, 대외무역도 활발하였다. 오히려 행상을 하는 하층민을 위하여 상거래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의 양반관료는 상인을 관념적 · 제도적으로 사민(四民) 중에서 가장 천시하였다. 그리하여 공 · 상(工商)은 과전법(科田法)의 토지 분급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보부상은 함경도 사민정책(徙民政策)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고려의 우왕과 공양왕 때 시행된 상인에 대한 규제도 대폭 강화되었다. 1407년(태종 7)에 서울은 한성부(漢城府), 지방은 도관찰사(都觀察使) · 도순무사(都巡撫使)가 행장(行狀)을 행상에게 발급하고, 이것이 없는 자는 도적으로 논죄한다고 하였다. 행장은 노인(路引)이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여행허가서이며 영업허가증이었다. 이러한 행상에 대한 구속은 상업억제, 세금징수, 물가조절, 호구파악, 치안유지, 국내비밀보호, 기존행상보호 등을 위한 것이었다.
『경국대전』은 행상을 육상(陸商)과 수상(水商)으로 나누고, 육상은 1인당 3개월에 저화(楮貨) 8장, 수상은 대선(大船) 100장, 중선(中船) 50장, 소선(小船) 30장씩을 납세하도록 규정하였다. 6개월 이내에 납입하지 않으면 행장을 회수하여 상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각 군 · 현 단위로 조직된 보부상 임방(任房)의 두목에게 신표(信標) · 답인(踏印) · 답표(踏標)를 지급하여 행상에 대한 수세와 감독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행상에 대한 감독과 징세는 법조문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행상은 전업 상인 외에도 정착하여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거나, 농사를 짓거나 수공업품을 만든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행상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자유로운 유랑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행상 중에는 재인(才人) · 거사패(居士牌), 쫓겨난 머슴이나 도망친 노비처럼 주거가 없는 부랑인이 포함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가난한 양반도 다수 있었다.
행상은 대부분이 육상이었고, 수상은 미곡을 주로 취급하던 부상대고(富商大賈)로서 큰 자본을 가진 경우가 많았으며, 그들은 배를 직접 타지 않고 고용인이나 소상인에게 대신 타게 하였다. 그러므로 행상은 기본적으로 자본이 적은 소상인을 면하지 못하였고, 만약 자본이 넉넉하면 좌상이나 농민이 되었다. 행상은 소금 · 어물 · 직물 · 종이 · 필묵 · 유기 · 솥 등 해산물과 농민들이 생산할 수 없는 수공업품 내지는 귀금품, 그리고 특산 농산물 등을 가지고 자급자족 경제를 영위하던 농민들을 직접 방문하거나 장시에서 사고팔고 바꾸었다.
행상의 밑천은 팔 물건을 사고, 그것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근력, 혹은 말 · 소 · 노새 등을 장만할 정도면 족하였다. 주객(主客) · 차인(借人)으로 불린, 운반 동물을 구비하고 있던 행상은 상대적으로 더 큰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만한 형편도 못 되는 행상은 객주(客主) · 여각(旅閣)에게서 자본을 빌리거나 상품을 위탁받아 판매하였다. 행상의 이득은 지역과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고, 주된 구매자가 자급자족하던 농민이었으므로 그 시장가격차는 크지 않았고, 거래량이 적은 이상 이득도 약소할 수밖에 없었다. 상업적 이득이라기보다는 열악하고 위험하던 교통조건을 무릅쓰고 운반한 노력의 대가라고 보는 편이 합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행상을 통하여 큰 자본을 가진 상인으로 성장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행상은 부근의 촌락을 돌며 닷새마다 돌아오는 사람, 주요 명절에만 돌아오는 사람, 수시로 돌아오는 사람, 정월에 떠나 연말에 돌아오는 사람 등이 있었는데, 특히 마지막 경우가 가장 많았다. 또한 가족을 동반하고 다니는 행상도 있었다. 따라서 행상의 활동범위도 다양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물품만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폐쇄적인 지역사회에 다른 지방의 소식을 전달하거나 혼인을 중매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행상은 농민이 아니고 떠돌아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장돌뱅이’라고 농민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행상들은 때때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행패를 부리고 도둑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행상은 상호이익을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런 대표적인 것이 행상청(行商廳) · 혜상공국(惠商公局)과 같은 보부상단체였다. 그러나 모든 행상이 여기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 뒤 상설시장과 점포가 늘어나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는 등 자본주의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 20세기에 들어와서 행상은 점차 사라졌다. 특히 먼 거리 행상은 빨리 소멸하였으며, 다른 행상들도 교통이 불편한 산간지역으로 물러났다. 또 도시의 길바닥이나 시장 구석에서 물건을 팔던 행상도 1914년에 제정된 「시장규칙」에 의하여 노점상으로 단속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단속대상이 되어 때로는 큰 분규를 빚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