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영

  • 역사
  • 인물
  • 개항기
  • 현대
일제강점기 때, 평안북도 광평장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해방 이후,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종교인·관료·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1956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89년(고종 26)
  • 출생지평안북도 의주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윤경로 (한성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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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안북도 광평장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해방 이후,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종교인·관료·독립운동가.

개설

평안북도 의주 출신. 윤연석(尹連錫)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9년 고향에서 선교사의 노방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뒤 고향인 광평면에 상광교회(上廣敎會)를 세웠고, 그 곳의 조사(助事)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또 두룽붕 가산리교회 등에서 영수(領首)직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광평장터에서 3월 15일 2만 여명의 면민과 시장사람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고, 그로 인하여 1년간의 옥살이를 겪었다.

192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용계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3년 목사 사임 후 상해로 건너가 잠시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다. 난징대학[南京大學]에 입학하여 학업 중 192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하였다.

1929년 귀국 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9년에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반대로 일제경찰의 주시를 받아오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즉시 구속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겪었다.

그 뒤 교회로부터 강제추방되어 백마에서 은둔생활 중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에는 평안북도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소련군 진주 후 월남하여 미군정하에서 충청북도 지사로 활동하였고, 6·25사변 때에는 미문화원과 극동 유엔군사령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국정교과서 편찬에도 관계하였다.

참고문헌

  • - 『크리스찬신문』

  • - 「신앙의 거목들: 윤하영목사」(김수진, 『교회연합신보』,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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