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보(德輔), 호는 난포(蘭圃).
1869년(고종 6)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2년에는 회환진하 겸 사은사(回還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 박규수(朴珪壽), 역관 오경석(吳慶錫)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4년에는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전정(田政)·동포(洞布)·사창(社倉)·수령광관(守令曠官) 등의 폐단을 별단(別單)에서 일일이 고하였다.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약 70일 동안 일본의 군사·교육·행정·공장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해 정부기구 개편 때 감공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개화정책에 비교적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부승지의 직에 있으면서 정변 후 승정원의 김옥균일파 비난에 동참하였다.
1885년에는 예방승지(禮房承旨), 1887년에는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 1893년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와 쓴 『일본문견사건(日本聞見事件)』과 『일본국공부성시찰기(日本國工部省視察記)』가 규장각 도서에 있다.